작가명 : 고룡
작품명 : 비도탈명
출판사 : 번역출판
연쌍비님의 대협심을 즐겨보다가 공지글을 보고서 뒤늦게 고룡의 비도탈명을 읽어보았습니다. 원제는 다정검객무정검이고 국내에는 소이비도,비도탈명으로 번역출판된 작품입니다. 제 기억에 예전에 한번 읽어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나긴 하지만 별로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걸 보니 당시 비도탈명을 보고서 별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정도 세상의 오미(달고,시고,짜고,맵고,쓴 맛)을 맛본 지금 다시 한번 읽어보니... 크 가슴이 짠해 옵니다. 그렇다고 제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딱 좋은 30대 입니다. 음 감상평을 길게 쓰면 읽으시는 분들이 힘드실 듯 하니 두가지 점에서 비도탈명의 감상평을 쓰겠습니다.
1. 인물의 생동성(다정검객)
고룡소설의 백미는 다들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물의 심리묘사라고 봅니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그들이 강호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심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협객이든 흑도의 거물이든 항상 옳기만 하고 악하지만은 않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항상 서로를 사랑하기만 하고 미워하지만은 않습니다. 옳기도 하고 악하기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바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하고 같습니다. 그래서 고룡소설을 읽으면 뭐라고 할까...
통쾌하다기 보다는 씁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뭔가 마음 한구석을 뿌듯하게 채워오기도 합니다. 제 느낌상으로 ㅋ
비도탈명의 주인공은 초류빈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이심환입니다. 아마도 편복전기가 히트를 쳐서 초류향을 본따 초류빈으로 개명한건지도 모르지요. 어째든 이심환은 과거 강호에서 비도하나로 혁혁한 명성을 떨친 청년무인으로 이탐화라고도 불리는 문무겸전한 인재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정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양보하고 괴롭기 그지없는 방랑길에 오릅니다. 온갖 시련속에서도 항상 그의 행동기준은 과거에 자신의 친구를 위해 정혼녀를 양보했듯이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고초를 다 겪지만 그는 결코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너무 다정(多情)하기 때문이죠. 번역제목인 비도탈명이 그의 무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원제목인 다정검객무정검은 그의 성격을 나타냅니다(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마음에 들지만 흥행에서는 전자가 더 유리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이 말하듯이, 검은 본래 무정하지만 사람은 무정하지 않습니다. 이심환은 정이 너무 넘쳐서 스스로 고행의 길로 접어드는 인물입니다. 보는 독자를 힘들게도 하지만, 원래 세상살이가 정 때문에 울고 웃듯이 강호도 사람 사는 곳인 이상 애환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고룡은 이러한 애환을 더할나위 없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삶이 순탄하지 않은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잘 아시다시피 고룡은 호협심이 있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와줬고 술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에 소홀히 하고 두번의 실연의 상처를 입고 노숙자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았다고 합니다. 그가 말년에 알콜중독으로 죽었을때 그의 전부인들과 배다른 자식들은 그의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심환에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우정을 중시하고 술을 좋아하면서도 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주인공은 작가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세상살이의 진미를 맛보지 않고서는 이런 작품을 쓰기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더욱 탄복하는 것은 주인공인 이심환 외의 조연들의 심리도 결코 간단하게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필생의 적수인 상관금홍도 단순히 흑도의 거물이 아닌 나름대로의 애환을 가진 인물로 그려집니다. 모든 조연들이 단순히 좋은 사람, 나쁜 놈이 아니라 저마다의 목적과 정(情)을 갖고 거친 강호에서 때론 눈물을 흘리고 때론 피를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의 악역 중의 한명인 설소하의 성격입니다. 설소하는 이것이 바로 악녀의 표본이다라고 할 정도로 보는 분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으로도 보입니다. 남자인 저도 읽으면서 불편했었는데 과연 여성분들이 이작품을 쉽게 읽으실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마도 작가의 두번에 걸친 실연의 아픔이 설소하의 성격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뭐 설소하 같은 악녀가 현실세상에 없으란 법은 없지요.
2. 결투의 비정성(무정검)
흔히 중국무협의 양대종사를 꼽으라면 김용과 고룡을 듭니다. 두 작가 모두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결투의 측면만 놓고 보면 김용작품에서의 결투는 기묘하면서도 화려한 맛을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재미있다 입니다. 제가 늘 감탄하는 무공이 바로 신조협려의 주인공인 양과의 암연소혼장입니다. 양과의 애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초식명을 볼때마다 과연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짐작이 안갑니다.
반면 고룡작품의 결투는 기묘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무공이 나오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고룡은 결투에서의 기세, 임하는 마음가짐, 주변환경을 중시합니다. 화려한 초식의 난무가 아닌 극히 절제되고도 집중된 오직 일수의 공격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아들을 동반한 검객과 같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보는 듯 합니다. 어찌 보면 피가 튀고 사람의 목숨이 결정되는 결투의 진면목은 고룡작품이 보여줄지도 모릅니다. 저도 검도를 10년 넘게 수련을 했는데 대련하는 모습을 보면 고수와 하수의 모습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하수끼리의 대련을 보면 공방(攻防)의 횟수가 많은 반면에 고수간의 대련은 거의 실수가 없고 단 한두차례의 공방으로 승부가 납니다. 대련도 이런진대 진검승부라면 더욱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겠지요. 싸움에 임하는 마음가짐 또한 중요합니다. 연습에서 제 아무리 잘해도 실전에서 펑펑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연습할 때는 잘한다고 평을 들어도 아직까지 시합에서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호구를 입고 시합장에 들어서면 입이 바짝 마르고 갑자기 시야가 좁아집니다. 주위의 소리도 잘 안들립니다. 그렇게 뻗뻗하게 굳어있는 상태에서 어리버리 하다가 두판 내주고 나오기 일쑤입니다. 하물며 진검승부라면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검도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합니다. 기세 또한 중요합니다. 대련과 싸움은 다릅니다. 무술고수가 뒷골목의 깡패한테 어이없이 지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실전경험의 차이와 함께 흔히 말하는 악과 깡이 "싸움"에서 무술기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반증이라고 봅니다.
고룡은 이러한 "싸움"의 진면목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작가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인 이심환과 그의 필생의 적수인 상관금홍의 대결은 정말 치열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초식의 치열함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공격하는 심리전의 치열함입니다. 서로의 생명을 결정짓는 단한번의 공방이 있기까지 양자는 무수히 상대방의 마음에 칼을 날립니다. 이러한 심리전의 묘사가 오히려 과도한 유혈낭자의 묘사보다 결투의 비정함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3.맺으면서
짧게 감상평을 쓴다는게 너무 어렵습니다. 짧지만 읽는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볼 때마다 한없이 부럽기만 합니다. 다만, 길기만 할뿐 두서없는 제 글을 보시고 단 한분이라도 무협의 향기에 심취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글 쓴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피와 살이 되듯이 무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분이든 독자분이든 무협의 고전을 많이 그리고 자주 접하셔서 무협의 진미를 느끼시길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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