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항몽
작품명 : 진가소사
출판사 : 동아&발해
먼저 진가소사를 추천하신 삼절서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삼절서생님덕에 진가소사라는 수작을 접하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격적인 감상글에 앞서 노파심에서 한가지 밝히자면 진가소사를 그 제목 때문에 임준욱 작가님의 '진가소전'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하고 혼동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단호히 말하건데 두 소설은 시대 배경이 명나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그 스타일도 전혀 다른 작품들입니다. 일단 제목부터가 진가소사는 '진가의 소소한 역사'이라는 뜻이고, 진가소전은 '진가소라는 사람의 전기'라는 뜻이니 아무 관련없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밝혔다시피 진가소사를 감상란의 추천글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으나, 6권까지 단숨에 읽어가면서 그 정취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진가소사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기존무협소설이 흔히 취하는 거대방파와 중원무림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 관점보다는 주로 진가평, 진소명 부자의 일상사를 위주로 하는 미시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장르문학에서 순수 문학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점과 각종 동양철학사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점, 당시 풍습과 문물을 고증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투자했다는 점에서도 다른 무협소설과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흔히 무협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거대방파들의 아전투구나 절대영웅의 성장기 등이 아닌 진가 부자의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무협소설이기 때문에 무공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진가소사에는 구대문파, 정과 사의 대립, 십만대산 마교같은 거대세력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여기저기서 개나소나 다 만드는 무림맹조차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작가님은 아버지 진가평과 아들 진소명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갈 뿐입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존경하며 따릅니다. 서로 닮았지만 또한 닮지 않은 부자, 그리고 그러한 부자와 연을 맺어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작가님은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독자와 함께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봅니다. 요새 어중이떠중이 누구나 다 리얼무협을 표방해도 이보다 더 리얼할 수는 없을겝니다. 대지를 가르고 하늘을 날으는 신공절학도 없고, 만담콤빈지 사제지간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농담만 따먹는 실없는 스승과 제자도 없으며, 심심하면 터지는 그 흔한 정사대전조차도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아들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만 있을 따름이죠. 물론 킹왕짱 세고 성질은 개떡같은 주인공이 아니어서 실망하는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진가 부자와 같은 주인공이 더 친숙하고 와닿습니다. 세상에 어느 주인공이 무공 수련하는 와중에 십여년에 걸쳐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저수지까지 판답니까? 결국 작가님은 서문에서도 잠깐 나왔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얘기를 무협이라는 틀에서 풀어내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거기가 21세기의 대한민국이든, 몇 세기 전 중국의 강호든 결국은 다 사람이 사는 곳이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이죠.
또한 진가소사에서는 보통 무협에서 보기 힘든 순수 문학적인 요소도 눈에 띄입니다. 진가 부자가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흡사 한국고전문학 '메밀꽃 필 무렵'이 연상됩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받은 느낌입니다만, 진가 부자의 고향인 우이촌과 어린 소명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산골의 묘사, 인정이 묻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소명이 점차 성장하면서 간간히 느끼는 물과 바람의 냄새, 계절의 흐름, 사람의 정취 등은 진가소사가 단순한 무협소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수 문학으로 격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흐뭇했습니다. 실제로 진가소사에는 작가님이 인용하신 다수의 한시와 직접 창작하신 노래까지 등장합니다.
그리고 진가소사에서는 곳곳에서 여러가지 동양철학에 대한 소개와 고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새 반쪽짜리 무협소설들이 대충 수박 겉핧기식으로 유불선 사상을 다루는 것에 비해, 진가소사에서는 보통은 잘 등장하지 않는 묵가를 비롯한 여러가지 동양사상을 비교적 명확한 원전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 또한 곁들이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러한 사상들을 등장인물과 스토리에 반영하려는 시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진가평이 유가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아들인 진소명은 도가와 묵가를 상징하고, 그에게 크나큰 상처와 깨달음을 준 망아저씨는 불가를 대표하는 인물일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주지만 결국에 화합과 화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특히 초반에는 따로 진행되던 진가평과 진소명의 이야기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이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록 진가평과 진소명은 각각의 방식으로 길을 가지만 종국에는 그 길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화의 화'를 통해 깨닫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진가소사에서는 당시의 명나라의 풍습과 문물에 대한 충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사는 이야기를 좀 더 실감나게 다루고자하는 작가님의 노력의 일환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각 권마다 거의 100가지에 달하는 주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작가님의 엄청난 노력의 정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디서 인용하였는지 원전까지 철저히 밝히고. 그에 대한 해석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적인 설정에 어긋나는 점까지 일일이 밝히고 있는 주석을 보노라면 작가님이 당시 문물을 고증하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지 알 수 있을 정돕니다. 솔직히 이러한 순수한 노력들은 별다른 사전 준비도, 글쓰는 각오도, 자신의 글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노력도, 독자에 대한 배려도 없이 그저 컴퓨터 앞에서 앉아서 키보드나 깔짝거리면서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당최 온라인 게임인지 채팅인지 개인 블로근지 구분도 안갈 정도의 반쪽짜리도 안되는 소설들을 양산해내는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정말로 귀감이 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많은 장점을 가진 진가소사도 완벽할 수는 없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보입니다. 물론 이 점들도 제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먼저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을 위주로 한 스토리 전개이다 보니 무협소설 특유의 스피디하고 박진감넘치는 장면들이 조금 부족해보입니다. 물론 그런 점이야말로 더 진가소사를 값지게 만드는 측면도 크지만, 문제는 이렇게 약간은 심심할 정도의 순후한 스토리를 많은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초절정무공의 성깔드럽고 무림과 판타지와 게임세계를 제 맘대로 오고 가는 먼치킨 주인공의 자극적인 모험기에 익숙해져버린 독자층이 과연 진가소사의 진정한 가치를 알까 의구심이 듭니다. 장르문학도 대중에게 사랑을 받아야하는데, 사실상 진가소사는 소위 요새 잘 팔리는 소설들의 트렌드를 역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결국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성을 획득하면서도 지금의 작품성을 유지 혹은 발전하는 것이 작가님의 앞으로의 화두가 되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봅니다.
다음으로 제가 장점으로 들었던 동양철학과 시대 고증에 관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자칫 잘못하면 단점이 되기 십상입니다. 작가님께서 거의 대부분 원문으로 올려놓은 주석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스토리에 몰입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철저한 고증은 좋으나 무려 100개에 가까운 주석들을 하나 하나 다 읽어가다보면 종종 스토리의 흐름을 놓치는 일이 벌어지고, 그렇다고 다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많았습니다. 일례로 최후식님의 수작 '표류공주'에서 수페이지에 걸쳐 당시의 조세제도와 법체계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었는데 솔직히 그 부분은 마치 역사서나 경제관련 서적에서 발췌한 듯한 느낌이 들어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두 작품 다 이런 부분들은 굳이 일일이 주석으로 달지 말고 작중에 간단한 묘사로 끝냈으면 훨씬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까지 길게 쓰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스크롤의 압박이 엄청나네요. 방금 막 여섯권을 한꺼번에 몰아쳐보고 감상문을 쓰는 거라 다소 두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진가소사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소설입니다. 판에 박힌 설정에, 고만 고만한 주인공들이 판치는 요새 무협소설들 중에 단연 눈에 띄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가님께서 처녀작이신만큼 개선되어야 할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작가님의 필력으로 보아 그러한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들어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PS) 사실 진가소사는 진가소전의 작가 임준욱님의 또 다른 작품인 '쟁천구패'와 더 비슷한 점이 많은 작품입니다. 물론 두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내용상의 전개나 구도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2대에 걸친 이야기라는 점과 주인공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점, 주인공이 이끌게 되는 단체의 성격이 그러합니다. 먼저 진가소사가 (진가평 - 진소명 - 등장할지 안할지 모르는 진소명의 자식)으로 이어진다면, 쟁천구패는 [우득명 - 우쟁천 - 우성패(실질적으로 스토리상에는 등장하지 않음)]로 이어지죠. 다음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에 나름의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점인데 진가소사의 진가평은 제가 한자를 정확히 몰라 추측컨데 '집안을 평안케 한다'는 뜻 같고, 진소명은 '크게 이름을 떨치다'의 반어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쟁천구패의 우득명은 '사명을 얻다'는 뜻이고, 우쟁천은 '하늘과 다투다' 내지는 '하늘을 놓고 다투다'는 뜻으로 추측되며, 우성패는 '패업을 이루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중심이 되는 단체인데 아무리봐도 진소명이 세우려고 하는 만의당의 정신은 우쟁천의 '홍락방'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사점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전체적인 주제의식에서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두 소설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PS2) 그리고 더럽게 길기만 한 감상문을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
PS3) 기왕이면 진짜로 시간을 내서 진가소사도 읽어보시면 더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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