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최진석
작품명 : 무법자
출판사 : 자음과모음
*** 존칭은 안 쓰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무법자는 악평도 많고, 호평도 많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고민을 좀 했다.
표류공주처럼 제목에서 느껴지는 포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음과모음이라는 출판사는 내게 있어 그다지 신용도가 높은 출판사가 아니다.
작가가 기출판작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보인 적도 없을 뿐더러, 세상을 두루 경험하여 연륜이 쌓였다고는 믿기 힘든 나이였다.
그러나... 나랑 생일이 같았다.
주인공-진화운이 기연을 얻는 부분까지,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문장이 동화틱하고, 깔끔했다.
마치 파산검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협 1순위가 파산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글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타인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이 카셀 노이 뺨치는 언어구사능력을 발휘하여 앉은 자리에서 타인을 바보만드는 신기를 발휘하면서부터였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실리주의, 합리주의, 적당주의자였다.
게다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출신이 좋은 것도 아닐 뿐더러
내숭쟁이 마누라와 약간은 애늙은이 냄새가 나는 딸내미를 가진 중년이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설정이다.
중년이 주인공이면, 왠지 여유가 있어보이고 경박하지 않아서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협 2순위는 독비객이다.
1권을 다 보았을 때, 이 소설이 왜 악평을 듣는지 알 것 같았다.
옴니버스라는 치명적인 약점.
뭐 어떠랴 싶었다. 수많은 무협 소설중에 이런 무협도 하나쯤 있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무협이든, 환타지든, 영화든, 게임이든 그 순간이 즐거우면 그걸로 나쁠 게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거기에 감동이 더해진다면 그만큼 더 오래 기억에 남을테고, 시간이 흘러 잊혀질만 하면 한 두번쯤은 더 들춰볼게다.
딱히 나쁘지 않았었는데, 아니 좋았었는데, 3권부터 스멀스멀 배신당하는 느낌이 나더니 4권에서는 뒷통수를 얻어맞고야 말았다.
진화운이 진화를 해버렸다.
이 녀석이 출세를 하더니, 자신이 아랫 사람일 때 무슨 말을 하고 돌아댕겼으며, 무슨 근거로 타인을 설득했는지를 까먹어버린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일까.
[작가와 독자는 속고 속이는 관계이다. 작가가 애를 써서 그럴듯하게 사기를 치면, 독자는 웃으면서 속아주는게 판타지의 미덕이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 이런 말을 프로즌님이 했었다.
지훈이 그랬고, 카셀 노이가 그랬으며, 진화운이 그랬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세상을 속이고, 타인을 설득하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변론했다.
그런데, 그들의 논리에 일관성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끊임없이 적당주의를 부르짖고, 합리주의, 개인주의를 외치던 진화운이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다.
'더러운 세상! 부숴주마'
일관성을 논할 필요도 없다. 머리와 꼬리가 극과 극을 달린다.
진화운이 그렇게 행동한 근거는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적자생존을 선택한 것이고, 그 와중에 자신의 철학을 근본부터 뒤집어 엎은 것이다.
작가가 그런 변신 과정을 얼렁뚱땅 넘기지도 않았다.
조직으로부터 이용당하고 휘둘려지면서 진화운이 분노를 느꼈다는 점을 충분히 묘사했으며, 독자로부터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도 성공했다고 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상황에서 진화운이 철학을 바꾸는 것이 필연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진화운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을테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상황을 설정했을 것이다.
즉, 진화운을 굳이 변화시켜서 일관성을 포기했어야 했는가. 이것을 말하고 싶다.
일장일단이라고 했다.
작가는 일관성을 포기한 대신 무협적 재미를 선택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복수는 가장 보편적인 무협의 주제이니까.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실속만 챙기는 주인공은 복수에 어울리지 않는다.
3권부터는 옴니버스의 틀도 벗어던졌다.
복수를 논하는데 무슨 옴니버스인가.
진화운의 변신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많으리라고 본다)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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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마디 안한 거 같은데, 아직 할 말이 많은데
꽤나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납니다.
10여년 전, 고등학교 시절.
논술모의고사를 보면 끄트머리에 꼭 이말을 덧붙이곤 했습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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