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백야
작품명 : 무림포두
출판사 : 기억안남
무림포두 3권을 읽었다. 대작의 향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무림사계를 읽었을 때와 매우 비슷한 기분이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복이지만, 동시에 똑같이 뇌달고 태어나서 이럴 수도 있는건가 싶다. 암만 용을 써도 이렇게는 못쓰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이걸 보고 전작인 약왕천하를 읽었는데, 무림포두 쪽이 더 나았다.
장르 문학에서 지략이 뛰어난 캐릭들은 다른 인물들이라면 그저 스치고 지나갈 단순한 정보를 가지고 사건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릴 줄 안다. 그 밑그림을 바탕으로 다른 정보를 수집하고 퍼즐조각들을 맞춰가는데, 대부분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근데 이 때, 전개가 좀 억지스러운 경우가 많다. 가령 결정적인 단서가 너무나도 우연적으로 나타난다든지 하는 그런 경우. 더군다나 애초에 그렸던 큰 밑그림 자체는 수정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정보나 상황에 따라 수정될 뿐이다.
문제는 한 번도 고쳐지지 않을 만큼 정확한 이 처음의 큰 밑그림이, 그것을 그리는 시점에서 반드시 그렇게 그려져야만 할 필연성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건 분석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정말로 단편적이어서, 그런 정보들에 들어맞는 큰 밑그림 같은 걸 여러개를 그릴 수 있다. 동그라미라는 단서만 있을 때, 그것만으로는 사과인지 배인지 감인지 알수가 없다. 근데 대부분의 경우, 사과다, 라는 것을 가정하고 들어간다. 썩은 사과다 풋사과다 하는 식의 작은 변경은 수시로 생겨난다. 마지막에 빨간 사과다 라는 결론이 사실로 확인되고, 해당 캐릭터는 무지하게 똑똑한 걸로 결론이 난다. 그러나 애초에 사과다, 라고 가정할 시점에 굳이 사과로 가정해야할 만한 필연적인 다른 정보가 드러나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사과라는 가정이 없었다면, 썩은사과인지 풋사과인지 하는 식의 검증과정도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실제 사건이 사과인지 아닌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해당 캐릭터가 하필 그 많은 동그라미 중에 사과를 가정하는 이유는, 단지 그 캐릭터가 사건을 해결해야 하고, 스토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극히 작위적인 것밖에 남지 않는다.
무림포두의 강만리는 좀 다르다. 동그라미라는 단서가 주어졌을 때, 그는 사과라는 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썩은 사과인지 풋사과인지 검증을 하다가, 뭔가 미심쩍은게 하나 발생한다. 그러면 사과라는 가정을 가차없이 포기하고 배라는 가정을 시작한다. 반드시 그것일 필연성이 없는 밑그림을 고수한 채, 그것의 세부사항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분석하는게 아니라, 안 맞는게 발견되면 밑그림 자체를 갈아버린다. 밑그림A를 그렸을 때 주어진 단서만으로는, 밑그림A가 사건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필연적 보장이 없다는 것을 강만리가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전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에게 무시무시한 능력과 노력을 요구한다. 사과라는 사건을 구성하고, 캐릭터는 사과인지 아닌지 알아맞히는 서사를 만든다. 그 때 캐릭터가 별다른 필연성도 없이(사과라도 가정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사과라고 가정해야할 이유도 딱히 없는)사과를 가정하고 그 틀 안에서 머리를 굴려 사과인지 맞추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사과로 시작했다가 감을 거쳐 배로 바뀌었다가 다시 사과로 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는게 훨씬 힘들다. 근데 무림포두는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죽인다. 무림사계를 볼 때도 아 이건 대작이 되겠다 싶었다. 무림포두는 2010년의 대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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