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황규영
작품명 : 천하제일협객
출판사 : 청어람
큰 재능 아래 강한 무공을 익혔으나 속성의 부작용으로 마성의 덫에 걸린 주인공. 협객이 꿈이었으나 살성이 되어 폐인처럼 떠돌게 된 그는 한 소녀에게 정을 줍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그녀가 납치되는데... 과연 그는 살심과 마성의 굴레를 딛고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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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런 명공이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빚을 때 그의 발 밑에는 깨진 도자기 파편이 무수히 쌓입니다. 그는 혼자입니다. 완성이야말로 그의 자존심이자 삶의 의미이며 목표이자 철학입니다.
그 도자기를 사용할 사람은 둘째 문제입니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면 작품의 가치를 자연히 알아볼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그는 고독하지만 존경받습니다.
그 옆에 도공(陶工) 황규영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도자기를 빚습니다. 사람들이 빙 둘러 싼 그 곳에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꼬마아이들에서부터 삼사십대 남자들까지 구경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가 빚어내는 도기들은 언뜻 가볍고 쉽게 만들어지는 듯 하지만 그만의 기교가 묻어나 매력적입니다.
자신의 도자기를 즐거이 사가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의 낙입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며 또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그의 작품이지만 명공을 따르는 이들은 진품명품의 공간에 그를 위한 단상을 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둘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시장에는 소수를 위한 상품과 다수를 위한 상품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 둘은 모두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고 각자가 가진 생각에 의해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만드는 이의 개성이 드러난 완성품을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산 불량 도자기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그런 작품 말이지요.
황규영 작가는 그러한 이야기꾼입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야기를 수차례 사람들에게 들려주길 즐겨했고 점차 능숙해 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출간하고 있는 천하제일협객이야말로 지금까지의 그의 경험과 재능이 모두 결집된 회심의 작품입니다.
천하제일협객에는 장르문학의 재미에 대한 황규영식 해법이 녹아있습니다.
물 흐르듯 진행되는 스토리. 인과관계가 뚜렷한 사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한 꺼풀 벗겨내 정곡을 찌르는 심리묘사.
천하제일협객에서 그의 소설의 가장 큰 기풍이 드러납니다.
바로 친절함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할 때 독자를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듯 진행하지 않습니다. 같은 선상에 눈을 맞추고 독자의 머릿 속에 이야기가 손쉽게 그려지도록 설명합니다.
제대로 알고 쓰는 지 모를 뜬금없는 개똥철학이나 식견을 자랑하는 듯 우겨넣는 군더더기가 없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작가의 성향대로, 사건과 사건 사이를 이동해가는 주인공의 움직임엔 항상 원인이 있고 동기가 있습니다.
이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가공, 변조되지 않은 채로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이다 싶은 그들의 '생각'을 단순함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인물이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당장 그 '생각'멘트를 지워보면 책장 넘기기 바쁜 독자들이, 위선과 흉계를 겉으론 꾹 눌러놓은 그들의 표정만으로 암중의 암투까지 상상하기란 요원해 질 것입니다. 적어도 이 소설엔 무골호인은 없습니다.
천하제일협객은 그가 이전에 쓴 어떤 소설보다 가장 큰 속도감을 자랑합니다. 바로 이전 작품의 주유성이 게으름과 느긋함으로 일관했다면 이번 작품의 서흑수는 마치 시한장치마냥 촉박한 상황속에 실낱같은 실마리를 이어나가며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 합니다.
때문에 주인공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 졌으며 서흑수는 강한 목적의식 아래 소설을 휘어잡아 이야기를 빠르게 주도해 나갑니다.
인지(認知), 그러나 찰나의 어긋남. 아슬아슬하게 헝클어지는 인연의 끈은 독자를 안달하게 만들고 어느순간 분노와 절박함 속에 주인공을 따라 이를 꽉 깨물게 됩니다.
이 감정에 동화하게 되면 마치 격류의 강물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아서 순식간에 소설 속으로 휩쓸려 버립니다.
감추려는 자와 찾아내려는 자의 싸움 속에서 수없는 선택을 해야하는 주인공. 그의 선택에 그녀의 운명이 달렸습니다.
'침착해야해. 내가 침착하지 않으면 그녀가 죽는다.'
이 와중의 심리전또한 처절합니다.
그가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흑수는 그녀를 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감춰야 합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 수년간 그를 지배해 왔던 것은 그가 저지른 통제불가능한 살육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뼈아픈 것은 이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어릴적부터의 꿈이자 삶의 목표인 협객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방황하고 있었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었으며 그에겐 그 자신조차 중요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드러나 스승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녀 하나를 위해 금기에 가까운 그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을 깨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무공을 사용할 수록, 무공이 강해질 수록 언제 마성에 빠져 무슨 짓을 벌일 지 몰라 축기조차 하지 않는 그의 고통과 절망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 강호에 발을 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을테지만 그녀 하나를 위해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성격은 독자에게 높은 점수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합니다. 단서가 없으면 만들어 내야 하고 혼자 힘으로 안되면 다른 이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감춰야 할 비밀 아래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이라도 서로를 의심하며 아는 것을 숨겨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아는 척 찔러야 합니다. 때론 동료를 미끼로 덫을 놓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미끼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고민하여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며 양보를 받아내기도 합니다. 주목을 받지 않으면서도 주도권을 갖아야만 하는 그의 현실은 그의 생각을 항상 두 곳 이상에 머물게 해야만 했습니다.
근래엔 착한 남자보다는 다소 이기적이더라도 능력있는 남자, 하지만 사랑에 약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추세입니다.
마찬가지로 서흑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소 이기적인 냉혹함을 보이지만 그 와중에 드러나는 과단성과 냉철함 그리고 무력이 겸비된 그의 능력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늘마저 이용하는 그의 거짓말들과 잔인함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라는 것에 이르면 자연히 동정심과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까마득한 음모를 쫓으면서도 답답함 없이 속 시원한 쾌감을 주는 것도 장점입니다. 잡을 듯 잡을 듯 놓쳤을 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응어리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적의 꼬리를 잡아 난폭하게 정보를 얻어내는 그의 모습에 우리는 쾌감을 느낍니다. 목적을 위해 신사인 척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정보를 취합하고 행동하는 그의 모습도 멋있지만 당이환에게만 눈이 팔린 수많은 적들의 뒤통수를 쳐서 도륙하는 과정의 통쾌함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얻어내는 단서는 많지 않기에 그녀의 흔적만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복수심은 끊임없이 타오르게 되고 이를 해소시키고자 항상 폭력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은 스토리를 숨가쁘게 따라가게 됩니다.
다른 장점은 밸런스를 들 수 있겠습니다.
장르소설에선 '제약'이야말로 소설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주인공이 멋대로 마정석을 찍어내고 마법을 무한정 난사하고 완전히 투명해져서 맘대로 돌아다니고 텔레포트를 끝없이 한다거나 정신제어로 누구나 현혹할 수 있다면 스토리가 너무나 손쉽게 풀려나가겠지요. 주인공은 바로 황제를 죽이고 제위에 등극할 수도 있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부하로 부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벽이 없는 미로와 같아서 드라마도 없고 스펙터클도 없어집니다. 때문에 소설에선 그러한 마법들을 책정하더라도 항상 그게 쉽지 않은 이유, 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이 방해받는 이유를 적어서 제약을 두게 됩니다.
이 제약이야말로 소설의 재미 중에 하나입니다. 김정률 작가의 다크메이지와 데이몬에서 주인공이 내공이나 마력을 그대로 가지고 시작했다면 고난이 없어지고 그저 깽판물로 전락해 버렸을 것입니다. 전동조 작가의 묵향에서도 여자로 변하고 무공이 사라졌다는 것이 새로운 긴장감을 안겼고 라이큐 작가의 부서진 세계에서 주인공이 마법 사용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제약도 소설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천하제일협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은 대단히 강한 무공을 가졌지만 한계까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가끔 선을 넘어 정신을 잃을 뻔하는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살기에 지배당하면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납니다. 그녀를 구할 수도 없고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횡행할 수 없고 때론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합니다. 살성에 지배되어 강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큰 대가를 담보로 한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향한 무차별적인 살육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꼬인 운명에 삶의 의미마저 놓아버렸던 주인공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모습을 그린 이 소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슬픕니다.
주인공의 깨어진 꿈과 자격지심도 안타깝고 그녀의 생명을 포기할 수 없기에 피를 말리며 집착하는 그의 사랑도 절절합니다. 이 둘을 연결한 극한 상황에서의 믿음은 독자의 마음을 울립니다.
이것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가독성에 치우쳐있는 장르 시장의 요구를 황규영 작가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좀더 비극적이고 숙명적인 분위기의 천하제일협객을 우리가 감상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슬픈 주인공의 운명에 숙명을 담아 미적거림없이 쾌속질주해 나가는 천하제일협객. 역시 4권에서도 이제까지 느꼈던 생각들을 재확인하며 큰 재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선 주인공과의 감정의 동화가 백미이자 장점입니다.
고소미를 잃은 서흑수의 초조감과 절박감 그리고 분노에 감정적으로 동화될 수 있다면 당신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에 별 느낌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당신의 취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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