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김재한
작품명 : 폭염의 용제
출판사 : 청어람
아쉬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14권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내용 진전은 그다지 없는게 아쉬웠지만, 여러모로 중요한 사건과 재미난 사건이 다발적으로 일어나서 즐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권에서 가장 깊었던 건 역시 루그가 볼카르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인정하고 6.5단계에 올라서는 부분이었습니다. 무려 14권 분량이나 이들의 행보를 지켜본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이들 둘의 대화가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회귀 직후부터 지금까지, 루그가 볼카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장난스러운 묘사나 잡담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러나 이번 권에서 처음으로 루그 내면에서 볼카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에 대한 묘사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인정했다는 것은 둘의 유대관계가 좀더 진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김재한 작가의 장점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이렇듯 작품 내에서 가벼움과 진중함의 간극을 아주 절묘하게 조절한다는 점입니다. 아픈 과거를 가졌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평소 가벼운 루그의 행실과 간간이 등장하는 루그의 과거 모습은 언뜻 미스매치로 느껴질 수 있으나 실은 회귀를 하면서 주인공의 정신적 성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가가 캐릭터의 진정한 내면을 숨기는 묘사방식으로 독자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잠시 말을 돌리자면, 저는 김재한 작가의 모든 작품 중에서 스토리 면에서 가장 가능성이 뛰어났던 작품은 마검전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흥행에 실패해 빠르게 완결된 작품이기도 합니다만은.. 달리 말하면 마검전생 까지는 스토리라인이나 필력은 충분히 고평가되었으나, 캐릭터 묘사면에선 사실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마검전생의 주인공, 라곤 클란드의 경우 베이런 크로네스라는 자신의 삶을 빼앗아간 인물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힘을 되찾으려 노력합니다. 구도 자체가 폭염의 용제의 루그의 모습과 무척 닮았지요. 하지만 폭염의 용제에는 있고, 마검전생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마검전생의 라곤 클란드의 복수심은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감정이입이 힘들다는 말입니다. 물론 힘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복수심에 불탄다는 게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이 판타지 속에서 자신이 가진 힘을 잃었을 때의 감정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이지요. 우리에게 가까운 힘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추상적인 것들이지만, 작품 속의 힘은 말그대로 직접적인 힘을 가리키니까요.
반면 폭염의 용제에서는 거의 비슷한 구도이나, 우선 세부적인 설정이 약간 바뀝니다.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사실 아주 흔하고도 가장 가깝게 와닿는─ 점을 복수심의 이유로 듭니다. 바뀐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인공이 힘을 되찾는 과정 또한, 라곤 클란드가 일종의 기연과 자기설계능력이 출중하다는 점만으로 역사상 전례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면,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조력자를 포함시킴으로써 좀더 개연성이 짙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강력한 존재가 조력자가 되는 부분 또한 데우스마키나적 연결이 아니라 작품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충분한 이유를 갖추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물 묘사면에서도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가벼운 분위기 속에 무거움을 담는 스타일이 더 심화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작품 내 캐릭터들이 좀더 '진짜같은' 느낌이 들게 되었습니다. 힘든 상황을 가볍게 묘사하는 것도 이전까지는 별로 자주 나온 방식이 아니었지요. 이 점은 사이킥 위저드와 비교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는 항상 암울하고 우울했으니까요. 초반에 깔아둔 배경설정을 끝까지 독자에게 비밀로 가져가는 점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요약하자면, 이 작품이 이 작가의 대표작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하여튼 중요한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쉬어가는 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14권입니다. 어찌됐든 드래곤의 비밀에 대해 또다시 한 걸음 다가간 느낌은 듭니다. 15권에선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지 기대됩니다.
Commen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