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사 - 작가 Y (필명이 범상치 않다..-_-)
무협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얻게되는 지식들이 있다.
무협상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무협을 떠난 이야기를 하게 될지라도 '달마' 라던가 '장삼봉' 같은 이름은 그렇게 낯선 이름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무협의 세계에서는 흔히 '무학(武學)의 대종사'라고 칭해지는 위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기러기의 날개짓도 구름의 움직임도 모두 깨달음이요, 무학의 원리였다고 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뻥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대단한 경지를 단지 전설상의 이야기라고 흘려듣고 싶지는 않다.
세상을 살며 얻는 경험들을 자신의 시야에 맞추어 무언가 배우고, 얻는 것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대단히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을 뿐이고, 그렇게 (감히) 생각해보니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나 역시 (평범한 대한민국의 남성) 세상을 살며 쉴새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도 모자라서 책을 읽으며 간접 경험까지 쌓고 있다.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내 나름대로 배우고 내 나름대로 깨닫게 된다면
달마니 장삼봉을 신기하게 생각할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길을 걷는다.
자신만의 배움을 얻는 것이다.
소설 감상을 쓰는데 장황하고 필요도 없는 잡설이 길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내가 가면사를 읽으며 생각한 어찌보면 엄청난 확대해석과
내 마음대로 느껴버린 소설의 의미를 정당화할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에게 각자의 길이 있듯이
독자에게는 각자의 독서가 있다.
누군가 어떤 글에서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는 전적으로 독자 고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꼬마애가 단군신화를 읽으며 홍익인간 대신 감금행위의 비창조성을 공감하게 되었다고 해도
난 그것이 잘못된 독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정 뭐하면 한번 더 읽으면 되고... (갑자기 심약한 모습)
※ 기러기의 날개짓을 보고 깨달은 바에 의해 기러기의 날개짓에서 어떤 부조리함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인간이 기러기의 날개를 꺾어댈 자격이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뭔가 느꼈으면 느낀대로 가만히 있자.. 괜히 작가한테 죽은애 살려라 그것은 틀렸다 참견하지 말고. 충고와 참견을 구분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듣기 나쁜 충고는 감사의 대상이지만 듣기 나쁜 참견은 용서가 어렵다.
난 무협이란 장르를 잘 모른다. (네가 아는게 무어냐! 고 묻는다면... 웃지요. -_-)
지금에 와서 신무협, 구무협 등등 구분의 필요성도 잘은 모르겠다.
정통 무협이라는게 무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통 무협이라는게 실재하고, 그 성향에 내가 떠올리는 특징들을 포괄하는 내용의 무협을 말하는 거라면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가면사는 절대 정통무협이 아니다. -_- (당연한가?)
내가 가면사를 처음 접한 것은 무협논단의 소개글 덕분이었다.
좌백님이 올리신 그 소개에는, 좌백님 나름대로의 평과 설명이 꽤 자상하게(?) 담겨 있었다.
되도록이면 감상을 쓰면서 좌백님이 쓰신 내용과의 중복을 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감상이라 해서 굳이 줄거리나 이런저런 설정들을 설명하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다.
가면사는 작가가 스스로 재미를 느껴 쓰는 글이라고 보았다.
이런 말은 조금 부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자유연재란의 대부분의 소설이 그런 취미상의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 단지 소설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을 넘어
쓰면서 스스로 재밌어서 주체를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닌가..? 틀렸을까?
작가 스스로의 감성과 극중 캐릭터의 감성이 섞여 둘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의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캐릭터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기 쉽게 한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캐릭터의 감성에 휘말려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글을 쓰며 바로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가면사를 읽는 도중 가끔씩 나는
스스로 캐릭터가 되어 흥분도 하고 좌절도 하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 역시 흥분감과 좌절감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면사의 매력 중 하나다.
가면사엔 뱀이 나온다.
뱀, 고금을 통틀어 뱀만큼 경외와 두려움을 받아온 동물이 있을까?
예로부터 뱀을 우상화하고 뱀의 영성을 묘사하기로는 이브를 유혹한 뱀의 예에서부터, 복희, 여와, 요르문간드, 메두사 등등 일일이 늘어놓기조차 어려운 역사와 신화가 있었다.
가면사의 작가 Y는 뱀과 인간이라는 나름의 주제에 대한 사색을 가면사에 아낌없이 풀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을 품으며, 혀를 낼름거리고, 서로를 칭칭 감아 부딪치는 뱀의 모습들은 그것이 바로 인간사의 다른 묘사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한 개체로 살펴보았을 때, 허물을 벗고 스스로의 꼬리를 물어 태극의 형태를 취하는 모습들은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인간의 머리와 네발 육식동물의 몸을 가진 '인면수'.
이성과 야성의 양립을 이뤄낸 그 끔찍한 괴수들에 의해 무너지는 주인공 자요의 마을.
비록 행복한것만은 아닌 과거였지만, 그 울타리가 무너져버린 지금은 과거를 그리워할 여유조차 없다.
자요에게는 별다른 힘도 각오도 준비되지 않았었지만 그것도 상관없이 그에겐 성장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아니, 생존을 위해서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 큰 세상에 눈을 떠야 하고, 그 큰 세상을 스스로의 눈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힘 역시 필요하다.
스스로의 시야를 가지고, 스스로의 정체를 깨닫고, 스스로의 허물을 하나 벗어던지고
당당히 '인면수'와 '본계'를 마주해 일어서야 한다.
'본계'는 질서와 유지에 급급한 사회의 또다른 상징이다. 그러나 인면수에 '백아'라는 나름의 질서가 있듯
본계에도 '천주'라는 나름의 정의가 존재한다.
주인공은 스스로의 정의를 세워
각기 다른 타인의 정의에 부딪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이름의 괴물에 해침을 받는 한 인간의 성장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작가가 이 감상을 읽으면 웃어제낄지도 모르는 일이다. -_-
지금 자요는 조금씩 배우고 성장하는 중이다.
스스로의 칼이 스스로를 향할때의 아픔을 배우고
아무래도 수상한 최양변이라는 녀석을 믿고 있으며
자신의 정의가 향하는대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며 그 길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자요가 결국 용이 될 날이 올까?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가면사가 참 독특한 무협이라는 것이다.
독특하다는 것은 때로는 호감, 때로는 꺼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가면사의 그 독특한 향기는 내게 그렇게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재밌다. (그럼 된거지 뭐.)
가짜얼굴뱀 이라는 제목 그대로
세상은 가면을 쓴 뱀들이 천지에 돌아다니고 있다.
골치아픈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소설 <가면사>가 던지는 메시지가 더욱 명료하게 다가온다.
"너도 뱀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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