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무협'이란 장르도,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 안에서 움직입니다. 자유롭게 중원을 누비며 모험담을 들려주는 이야기들의 군집이면서도,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듭니다. 지나치게 따라가면 뻔하다고 싫어하고, 너무 튀려 노력하면 아예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허나 그 좁은 틀 안에서도 각자 추구하는 바와 영향받은 세력은 다르기 마련이고, 때문에 무협이란 장르 문학은 좁디 좁은 속에서도 꾸준한 발전을 해올 수 있었습니다.
[쉿! 강시]는 제목 그대로, 강시 소녀 혜림이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의 장점이자 강점은 혜림의 캐릭터고, 약점이자 단점 또한 그녀의 존재입니다. 일반적인 강시(및 좀비)는 이미 사고를 잃어버린 존재지만, 그녀는 어린 소녀다운 치기와 함께 사천 무림을 뒤흔듭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나도 강시는 강시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자의 행동과 사고는 한계가 있으니, 그녀에게는 보호자와 여러 주변 인물들이 달라 붙습니다. 허민오는 끔찍하게 죽어간 손자 대신으로 그녀를 돌봐주려 하지만, 결국 맺고 끊음이 불명확해 파국을 불러오게 됩니다. 앵무는 혜림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 하지만, 그 한계를 알지 못해 일을 지나치게 키워버리고 맙니다.
혜림은 매우 훌륭한 캐릭터입니다. 그녀가 원하는건 다시 살아나 이뻐지는 것 뿐이지만, 사천무림은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얽히고 설키는 사건의 전개와 갈등의 구조는, 작가의 첫 작품으로 보기에 매우 빼어납니다. 그 외의 캐릭터들도 하나하나 또렷한 개성을 가진 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너무 극단으로 달려갑니다. 음모와 협잡은 장르의 단골이지만, 분량에 비해 지나치게 많고도 갑작스럽습니다. 피와 살이 튀는건 사람 죽이는데 당연하지만, 그 정도와 횟수가 도를 넘어 오히려 둔감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혜림의 학살과 허민오의 무책임한 방관은 꽤 부담스러운데, 어찌 보자면 식상한 전개인지라 조금 아쉽습니다. 엔딩은... 솔직히 너무 많이 보아온 그대로군요.
[쉿! 강시]는 잘 된 데뷔작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잔혹성과 극단적인 전개 때문에 부담이 되고, 각성(?) 혜림의 학살은 고어도가 높은 좀비 영화 그 자체라 다소 아쉽습니다. 읽는 이에 따라 패가 갈릴 마니악한 작품이지만, 어느 선 이상을 가지 못해 슬프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입한 보람이 있었습니다만, 모두에게 적합한 책은 아닌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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