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저도 12라운드 끝나고 숟가락 집어던졌다는 걸 밝힙니다.
재미? 진짜 없었습니다.
어렸을적에는 프로 복서 데뷔를 준비했었고, 아직까지도 개인적으로는 복싱인이라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 경기가 정말 재밌기를 바랐습니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전국의 수많은 파이터(?)들이 복싱을 시작하고, 그게 붐이 되어서 다시 우리나라에 복싱이 인기가 많이 생겨서, 지금은 폐지를 줍고 계시는 우리 관장님, 한때는 세계랭킹 1위까지 오르고 세계챔피언결승전까지 치르셨던 우리 관장님께서 밥 굶지 않고 사실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었습니다.
그래서 12라운드를 마치고도 펄펄 날뛰는 메이웨더를 보면서 숟가락을 집어던지지 않을 수 없었죠.
하지만 여기 게시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타가 빵빵 터지고 피가 튀는 난타전, 정말 재미있죠. 선수의 턱이 들리고 목이 돌아가면 관전하는 저도 목이 뻣뻣해지고 이가 시리죠.
하지만 오늘 경기도 관점을 조금만 돌려보면 충분히 재미있었어요.
먼저 두사람의 기량이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메이웨더가 그냥 도망다니기만 하면서 포인트만을 노렸다고 볼 수는 없다고 봐요.
메이웨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카운터를 노렸습니다. 그의 오른손은 첫라운드부터 항상 턱 밑에서 바짝 힘이 들어간채였어요. 파퀴아오가 섣불리 달려들었다면 아마도 리치가 10센티나 더 긴 메이웨더의 오른쪽 카운터에 넉다운당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메이웨더는 그 카운터를 날릴수가 없었어요.
왜? 파퀴아오는 이미 그게 날아올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는 메이웨더의 카운터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어요. 또한 마르케스에게 비슷한 카운터를 맞고 실신 케이오를 당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에게 비스듬히 서는 숄더롤 자세에서는 이미 긴 상대의 리치가 더 길게 느껴지기 때문에 파퀴아오는 심하게 카운터를 견제했죠.
그러다보니 파퀴아오는 평소처럼 리드펀치를 날리며 거리를 좁히는 방식을 구사하지 못했어요.
그가 중간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경기는 메이웨더의 페이스로 흘러갔죠.
장거리는 메이웨더가 가장 선호하는 거리였고, 근거리는 클린치로 철저하게 방어했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어요.
어쩌다 한번씩 날아가는 파퀴아오의 레프트도 메이웨더의 패링에 여지없이 막히더군요. 둘의 펀치 스피드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오늘의 문제점은
1. 경기가 끝날때까지 하이라이트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어요. 라운드간의 휴식시간이 모두 광고로 가득차면서, 시청자들은 두 스피드 스타의 엄청난 기교를, 그 순간적인 격돌을 조금도 확인하지 못했죠. 경기전에 sbs의 해설진들도 말했다시피 두 사람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슬로우비디오가 필수예요. 하지만 페이퍼뷰가 아닌 국내 사정에서는 광고수익이라도 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광고가 슬로우비디오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면서, 진짜 복싱의 재미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2. 두사람의 오늘 경기는 사실 어느정도 예상했던 대로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파퀴아오가 뭔가 보여줄거라고 믿었죠. 메이웨더의 철벽을 파퀴아오가 어떻게 뚫을 것이냐, 이게 바로 오늘의 관전 포인트였죠. 6라운드에서 뭔가 기어를 올리는 것 같은 모습을 파퀴아오가 보여주면서, 그가 시합의 분수령을 후반으로 가져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하지만 9라운드, 10라운드가 지나도 터져줘야 할 것이 터지지 않았죠. 파퀴아오는 여전히 메이웨더의 카운터를 견제하고 있었고, 그의 리드펀치는 점점 더 빈도수가 줄어들었어요. 오늘 파퀴아오는 모든 인파이터가 짊어져야 하는 굴레, 위험으로 한걸음 더 뛰어들어야만 하는 손해보는 포지션을 택하는 것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준비해온 것들을 전부 펼쳐보지도 못한채 경기를 끝내야 했죠.
3. 판정도 뭔가 애매했어요. 116대 112는... 그래요, 이해할 수 있다고 치죠. 공격적인 자세보다 포인트 획득에 더 중점을 둔다면 가능할수도 있는 점수차예요. 하지만 118대 110? 이건 정말 아니죠. 나올수가 없는 점수예요. 아마추어 복싱에서도 저렇게 점수를 매기지는 않았을 거예요. 파퀴아오가 유효타를 전혀 못 넣은것도 아니고, 메이웨더가 일방적으로 경기를 끌어나간것도 아닌데 저정도 점수차라니. 저건 정말 편파적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요. 제가 점수를 매긴다면... 112대 110으로 메이웨더 승 입니다.
결론.
경기는 재미없었습니다. 그건 모로봐도 명백한 사실이죠. ^^;
하지만 저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늘 경기도 충분히 재미 있었어요. 제가 3억씩 주고 경기장에가서 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요일 점심의 황금시간대에 집사람과 아이들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두시간이 넘게 티비앞을 사수할만한 가치는 있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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