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실의 봉건제는 엄밀히 말해 하나로 묶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각 지역마다 다른 문화와 다른 역사와 다른 풍습이 있었고 큰 범주에서 그것들을 봉건제라 말할 수 있을지언정 세세한 부분을 확인하다보면 어마어마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프랑스의 봉건제를 봅시다. 프랑스의 봉건제는 저희가 흔히 아는 왕 -> 공작, 후작 -> 백작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왕은 일 드 프랑스라 불리는 아주 자그마한 직할지 안에서 살았으며 각 지역의 공작들은 그냥 자기 살고 싶은대로 살았습니다. 다만, 후작이라는 칭호는 임명제였으며 주로 명망높은 지휘관이나 각 지역의 대영주들이 받아서 그 지역의 방위를 책임지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러다 후기 중세로 되면서 후작이라는 칭호는 유명무실화됬고 자연스레 공작들의 칭호와 합쳐지게 됬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노르망디 공작위가 있겠습니다. 원래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칭호 따위 없었고, 대신 노르망디 땅을 다스리는 영주는 뉴스트리아 후작이자 루앙 백작이라 불렸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뉴스트리아 후작이라는 칭호는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애매하게 사라졌고 언제부터였는지 노르망디 공작이라 불리게 됬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봉건제를 봅시다. 신성로마제국은 동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룩 룩 룩셈부르크, 체코, 오스트리아, 서부 폴란드를 차지하고 있던 봉건 제국입니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랑크 왕국을 착각하는 사람이 가끔 보이던대, 둘은 완전히 다른 물건입니다. 프랑크 왕국을 제국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라벤나 총독으로서 교황이 샤를마뉴 대제에게 대관식을 열어줬기 때문이였지만 정작 그것을 신경쓰는 사람은 딱히 없었고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 때에 왕국이 흩어지자 흐지무지 됬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그 후 독일왕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로마인들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받고 인근 지역을 평정하며 새롭게 만들어낸 제국이였고 이건 누가 봐도 제국이였으며 황제부터도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매우 신경쓰곤 했었습니다. 나중에 근세가 되면 ‘신성하지 않으며, 로마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고, 제국은 더더욱 아닌’ 이라는 평을 받지만 그건 그때 얘기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봉건제는 얼핏 보면 프랑스의 것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도 유사한 점이 다수 존재합니다. 대륙 게르만 문화권을 상징하는 2개의 대표적인 국가가 프랑스와 독일이였으니까요.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다수의 차이점이 보입니다.
우선, 신성로마제국은 선거라는 개념이 영주들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이쯤되면 ‘엥?’ 하실 분들 좀 나오겠죠.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동 프랑키아라 알려져있을 때부터 이미 선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동 프랑키아의 왕 루이가 죽은 이후 동 프랑키아의 귀족들은 서 프랑키아와의 동군연합을 바라지 않았기에 투표를 통해 프랑코니아의 콘라드를 왕으로 선출했으며 콘라드의 죽음 이후 왕관은 콘라드의 자식에게 상속되는 대신 작센의 하인리히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하인리히가 죽은 이후에 왕관이 하인리히의 아들인 오토 대제에게 넘어갔지만, 이것은 왕관을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인리히의 영향력과 영지를 물려받은 오토를 다른 귀족들이 왕으로서 선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특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지만 그 특권중에는 투표를 통해 왕 혹은 황제를 선출하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됬죠.
그 외에도, 파리를 중심으로 한 직할지에만 주로 짱박혀 보냈던 프랑스왕과 달리 신성로마제국은 수도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대신 제국 곳곳에 흩어진 궁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수도에 항상 머무르는대신 제국 곳곳에 흩어진 궁정들을 끊임없이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자연스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단순히 봉건국가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전국구 정치인 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왕이 단순히 ‘니들 그냥 살고 싶은대로 살아~’ 라는 모습을 보이는 무기력한 방임주의 봉건군주였다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문제가 생기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야 너 계속 그렇게 할래?’ 라 꼬장부리는 귀족정의 종신 대통령에 가까웠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헝가리의 봉건제가 있습니다. 헝가리의 봉건제는 정말 특이하기 짝이 없죠. 아마 7왕국 시대 잉글랜드의 봉건제와 삐까 뜰 수 있을 것입니다. 헝가리의 봉건제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중앙집권적 봉건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순 같죠? 모순 아닙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중앙집권체제와 봉건체제는 불안한 동거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행정력이 부족해서 봉건제의 필요성이 대두됬지만, 동시에 왕국이 정복자에 의해 시작되었거나 아니면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왕실의 영향력이 왕국 곳곳에 뻗혀나갈 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전자의 사례는 노르만 정복 이후의 잉글랜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에서 볼 수 있고, 후자의 사례는 필리프 4세 이후의 프랑스 왕국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헝가리는 마자르 사람들이 동쪽에서부터 말타고 달려와 만들어낸 왕국입니다. 그들의 고향은 머나먼 동쪽의 광활한 스텝지방으로, 모라비아, 독일,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이 4개의 세력 사이에 일종의 무법지대처럼 흐트러져있던 헝가리 평원을 바로 이들이 정복하고 통일했었습니다. 그래서 마자르 사람들은 일종의 황인과 백인사이의 혼혈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서양과는 달리 동양처럼 성을 앞에 두고 이름을 뒤에 둡니다. 김재형이라는 이름이 서양식으로 말하면 재형김이 되지만 마자르식으로 말하면 다시 김재형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만으로도 특이하지만, 헝가리 왕국의 특이성을 그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헝가리 왕실은 무려 왕국의 30%나 되는 방대한 직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직할지를 중심으로 나머지 왕국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왕실이 직할지가 아닌 지역에 비상속 직책을 가진 왕실의 인물을 파견할 때도 많았습니다. 프랑스에서 공작이 왕을 모욕한다면 그 공작은 그냥 별 문제 없이 잘 살지만, 헝가리에서 영주가 왕을 모욕한다면 그 영주는 목 씻고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최대한 만끽해야합니다.
그 외에 7왕국 시대 잉글랜드의 봉건제도 매우 특이하지만 쓰다보니 좀 지쳐서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현실에 봉건제는 각 지역마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다양한 봉건제중 어느 봉건제와도 유사점을 찾기 힘든 판타지 세상의 봉건제는 전혀 현실에 존재했던 제도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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