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이 무섭습니다.
어렸을 적에, 유치원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울었었지요.
그랬다가, 꽤 오랜 시간 잊고 있었습니다.
몇 주 전 전날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그때부터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습니다.
모든 것은 끝난다. 나도 그렇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죽었다.
진시황같은 최고의 권력자도 죽었다.
나도 죽는다.
더는 생각할 수도, 새로운 것을 볼 수도, 겪을 수도 없게 된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이 글을 쓰는 육체는 지금이 전성기, 앞으로 80년에 걸쳐 점차 쇠퇴하겠지.
인생선배들이 이야기하는 노화는 무섭다. 배터리처럼, 가면 갈수록 빨리 소모되고 느리게 충전되는 체력. 운동이 삶의 발전이 아닌,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로서의 발버둥이 되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이런 삶을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벌써부터 몸이 하나씩 망가져가는게 느껴진다. 방광에 신경증이 생겨 1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야 하고, 우울증의 여파에 아직도 시달리는 중이며, 발목은 관절이 조금 나갔고, 허리는 쑤신다.
술 많이 마시면 혈관이 좁아지고, 유전상 혈관에 지방 끼는 것을 조심해야 하며, 이어폰을 크게 틀어두었던 귀는 청각이 약간 약해졌고, 눈은 안좋고, 코에는 비염이 있다.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마음같아선 희망적으로 100세까지 살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면 그전에 전자회로에 나의 뇌를 카피하는 기술이 나와서, 아니 내 뇌를 살릴 수 있는 기술이 나와서 가상현실에서 영생을 살아가는 행복회로를 돌려보지만,
나는 그런 달콤함을 믿기에 너무 똑똑하다.
여태껏 한 번도 죽음을 피한 사례가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세대에서, 그것도 내가 죽기 전에, 영생을 성취해내는 운 좋은 경우따위를 믿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대충 살았을 때, 아마 60세까지 살지 않을까.
세상에.
삶이 2/3밖에 남지 않았다.
40년 후면 나는 죽을수도 있다.
이 글을 치는 손가락이 더는 움직이지 않고, 이 삶을 살아온 기억이 더는 이어지지 않고 마치 한때 철썩였던 바다의 포말과 같이 증발하며, 영원히 생각을 할 수 없고 ‘나’라는 존재가 없게 된다.
더이상 재미있는 것을 할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내가 ‘나’라는 존재라는게 너무나 불합리하고 두렵고 무섭다. 죽음이라는 바다 아래에서 잠깐 창문을 열면 그 새까만 바람이 부랄 안쪽까지 머금어진다.
내가 죽는다고.
내가 죽는다고?
왜?
어떻게?
어째서?
이렇게?
저렇게?
내가 사람이라는게, 언젠가 끊어질 생명이라는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머리채를 움켜쥐게 만든다.
안다, 이게 여느 감정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이어가도록 설계된 감정이라는 것을.
사랑은 번식을 위해, 분노는 자기보존을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지간한 자살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서럽다.
안다,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 정도는.
그런데 이 두려움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지는 모른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싶다고.
그런데 나는 떠나고 싶지가 않다. 그냥 도저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것도 호르몬의 작용이고 전기신호의 일종이니,
그러니 나이가 들면서 체계가 조금 바뀌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시당초 이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 공포가 시도때도없이 찾아와 나의 일상을 괴롭힌다는 점이다.
하루에 몇번이고 한계를 넘는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마음에 금이 간다.
이거, 무슨 정신병 같다.
해결책은 나의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두가지 뿐이다.
죽지 않을 방법을 찾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을 찾던가.
그런데 보아하니 첫 번째 방법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은 실제 성공 사례도 있고, 나를 바꾸면 어떻게든 가능할 듯싶다.
그래서 어디든지 털어놓고, 누구에게든지 말하고 싶다.
혹시 아인슈타인처럼, 우리 엄마처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성공한 사람이 이곳에 있나요?
있다면, 혹시 그 지혜를 나눠주실수 있나요?
아니면 제 현재 상황에 대한 조언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질까요?
요즘 이 화두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깊이 고민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공포가 각인됩니다. 크툴루 소설의 옛 것들이 묘사하는 공포가 이런 걸까요.
침대에서 한동안 생각에 잠 못 이루다가 여기에 글을 씁니다.
Commen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