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범인의 전화 기다려져요"
영화 감독 봉준호(34). 일찍이 단편 <지리멸렬>,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개>로 ‘기대주’로 꼽히다 마침내 <살인의 추억>(싸이더스)으로 예정된‘대형 사고’를 친 그 사람.
<살인의 추억>의 소재가 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평범한 사람일것이란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듯, 그 대단한 작품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역시 겉보기엔 평범해 보였다. 큰 키에 지적이고 순해 보이는 얼굴, 꽤 미남이다.
그를 만나기 전 고민이 있었다. 이미 숱한 인터뷰를 통해 비슷한 질문에비슷한 대답을 했을 게 뻔한 터에 뭘 물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할 때마다 ‘버전’을 달리하는 능력이 있었다. 역시비범한 사람이다. 그가 풀어 놓는 <살인의 추억>에 얽힌 평범하지 않은 얘기를 들어보자.
# 왜 살인을 추억할까
언젠가 그는 “<살인의 추억>은 살인이 결코 추억이 되어선 안된다는 역설적인 의미”라 했고, 한편으로 “사건의 기억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란멋진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심적 부담이 컸다. 연관된 많은 사람들, 이를 테면 피해자 가족이나 용의자로 고초를 겪은 사람, 또 사건 현장을 지켰던 경찰들이 생존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있었던 끔찍했던 사건을 재연한다는 것 자체 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다. 슬픔과 연민의 태도로영화를 만들고, 이 점을 영화 팬들과 관련자들이 공감해 준다면 떳떳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요즘 더 큰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영화가 슬픔과 분노를 제대로 전달한 것 같아 기쁘다. 하지만 영화가 뜨면서 ‘범인을 다시 잡자’는 등의 캠페인이 벌어지는 것은 부담스럽다.
영화의 파장이 현실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는 걸 경계한다.”
# 추억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굳이 <살인의 추억>의 족보를 캐자면 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범죄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던 차에 조감독 시절이던 96년 화성 사건을 다룬 연극 <날 보러 와요>를 관람한 뒤 이 사건을 소재로 사실적이고사람 냄새 나는 범죄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1년여 동안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가상의 범인과 무수한 대화를 나눴다.
“끔찍한 사건에 대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 때 우린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무척이나 범인을만나고 싶었다. 영화 속에서 실체는 모호하지만 분명 두 형사 외에 또 하나의 주인공이기도 한 범인을 만나 얼굴을 확인하고, ‘당신이 죽인 여자를 아직 기억하는 지’ ‘그런 죄를 짓고도 지금 행복한 지’ 등을 물어보고 싶었다. 요즘엔 범인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냉철하고 냉혹하지만 어쩌면 평범한 얼굴은 아닐까. 이런 걸 떠올리면 더욱 섬뜩하다.”
모 인터뷰에서 봉 감독이 “요즘 범인이 한밤중에 불쑥 찾아오는 과대망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 대목을 떠올리고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지금 범인이 당신을 찾아 온다면?”
“만나자면 만날 용의가 있다. 물어볼 것 물어보고 자수를 권하던지, 아니면 때려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 트집잡기
그는 "내가 찍은 영화를 제 정신으로 볼 순 없다"고 실토했다. 작품성과흥행성을 두루 갖춘 빼어난 영화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많은 듯하다. 그렇다면 가장 그의 맘에 안 드는 <살인의 추억> 장면은.
“피살된 여인이 우산을 들고 남편을 마중 가는 장면이다. 살해되기 직전의 뛰어가는 쇼트들을 다시 찍고 싶었다. 조건과 상황이 꼬인 탓에 강렬한서스펜스를 살리지 못했다. 관객들이 이 장면의 허술함을 짚어내지 못했다면 이는 분명 편집과 음향 효과 덕분일 것이다.”
그는 ‘몇몇 장면들은 관객 입장에서 쉽게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다’는지적에 대해 “조만간 영화 홈페이지에 직접 글을 올려 팬들의 궁금증을풀어주겠다”고 화답했다.
한편으로 “<살인의 추억>은 워낙 소재가 유명했기 때문에 사건의 친숙함등으로 흥행에서 플러스 알파를 얻은 것 같다”며 영화 아카데미 동기생인장준환 감독의 첫 연출작 <지구를 지켜라>에 진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독특한 상상력과 뛰어난완성도를 지닌 데다 유머와 공포까지 뒤섞인 작품인데...”
# 세 번째 영화
그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역시 평단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니 <살인의 추억>에 이은 세 번째 영화에도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플란다스의 개>는 내 몸 안의 작은 것들을 꺼내보이는 듯한 소소한 얘기였고, <살인의 추억>은 방대한 사건과 훌륭한 원작(연극)을 배경으로 사건과 원작의 바다에 다이빙한 스케일이 큰 영화였다. 요즘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차기작(청어람 제작 예정)을 준비 중인데 굳이 소개한다면 ‘SF의 탈을 쓴 사실주의 영화’라고 할까. 서울이 주무대인 범죄 영화가 될것 같다.”
“당분간 푹 쉬고 싶다”는 그는 이달 말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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