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인 무협소설의 레퍼토리는 대동소이합니다. 유복한 가정, 갑작스레 들이닥친 혈겁, 구사일생한 어린 주인공, 우연(?)히 얻은 기연, 폐관수련과 강호출두, 양민학살과 꽃수집, 번쩍번쩍하더니 으악 켁 하고 복수성공.
그런 비슷비슷한 소설들을 참 재미나게도 읽었습니다. 최현석 셰프처럼 “비룡승천!”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내공심법 하나 안떨어지나 하면서 엉뚱한 생각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 어려서 늘 같은 것도 새로웠고, 무공이라는 것이 게임 속 스킬북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마스터되는 물건처럼 생각되었죠.
그런 와중에도 나름 생각이 있는 작가들이 쓴 책이 있었는지, 엄청난 내공에 가공할 무공을 십년간 익히고 나온 주인공일 지라도 갓 출두했을 때 무공이 낮은 무인들에게 제압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주인공에 감정이 이입된 채로 소설을 읽다가 그렇게 제압을 당하면 제가 다 분통이 터져 얼른 넘어가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차라리 독이나 암수에 당하면 이해라도 하지, 정면대결에서 제압을 당하다니 말이죠. 십년 무공을 헛배웠나 하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늘 그런 책들이 내세우는 것은 ‘경험’이었죠.
대체 그 깟 경험이 뭐라고. 제 머릿속에서는 2m가 넘는 거구의 어른이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1.3m 정도 밖에 안되는 골목대장 아이들에게 당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무공서적은 마스터스킬이 아니겠습니까. 그깟 경험 조금만 있으면 쌓이는 거 아닌가요?
그런 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할 때 즈음인 것 같습니다. 영웅문 시리즈를 그 때 처음 읽었고, 무협의 시초에서 말하는 무공에 대해서 알게 되고, 학교 복싱부에 들어서 아마추어 복싱대회들에 나가고, 이기기도 하고 깨져보기도 하면서 경험과 교본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게 된 것이죠.(갑자기 ㅇㅅㅈ의 허세찬 영상들이 떠오르네요. 반성합니다.) 구명절초를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는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몸놀림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혼자 춤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었죠. 똑같이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려도 원원투인지 원투 원원투 인지, 투원투인지, 원투를 날릴 때 잽의 힘을 어느정도나 실을 것인지 링의 끝이 어디에 있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면 어느쪽으로 스텝을 밟을 지 스텝을 밟으면서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카운터 잽을 날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빠지면서 체력을 비축할 것인지... 훨씬 단순한 복싱에서도 한 순간에서도 생각해야 할 것 응용해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하물며 몇십초식의 정해진 루틴을 경험도 없이 상황에 맞게 응용해서 사용한다? 말도 안되는 거였죠. 혼자하는 수학공부도 책에서 배우는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해도 시험에서 실전에 부딪치면 어버버하다가 응용을 못하고 틀리는 게 수두룩한 판국에, 스파링 한번, 대련 한번, 목숨 건 사투를 한번 해보지도 않고 책한권 봤다고 강해지다니... 제가 너무 순진했었지요. 무공의 위력이라는 것이 요즘은 설정따라 강함의 한계가 정해지기 때문에 현실적인 영웅문의 세계관을 굳이 따올 필요는 없지만, 경험없이 힘만 세진다면 싸울 줄 아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최홍만이 42세 늙다리 파이터에서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은 그런 구무협 스타일의 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만, 그래도 간간히 보입니다. 요즘은 대세가 현대물로 넘어온 탓에, 사실 훨씬 더 심각해졌다고 봅니다. 마나인지 뭐시깽인지 뭔가 특수한 힘이 몸을 바꿔서 남들보다 조금 더 강해진 사람이 교본보면서 일년간 혼자 수련하고 UFC 파이터를 때려잡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literally한 real time killing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흘려보낸 내 시간아 미안하다. 이런 걸 읽게 해서... 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어릴 적 처음으로 환상문학을 접하면서 느꼈던 흥분이 (반강제로) 다시금 떠오르는 것 같아서 기껍진 않아도 향수가 느껴지기는 하더군요.
책은 책일 뿐입니다. 학창시절 모두가 같은 책으로 공부했지만 모두가 같은 성취를 얻지는 못했죠. 무공서적을 얻고 읽는 것만으로 고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전교1등이었을 것입니다. 파이터계는 보디빌더들이 장악하고 있었겠죠. 앞으로는 읽는 작품에서 교본하나 읽었다고 UFC 파이터를 때려눕히는 장면이 없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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