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허담.
작품명 : 신기루
출판사 : 청어람
仁兄에게 드리는 글.
요즘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는 ‘신기루’라는 제목의 책으로 소일을 했습니다.
仁兄. 소설이란 무엇일까요? 아니,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요?
소설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글들이 조회 수라는 검증의 요건이 될 수는 절대로 없는 하나의 자와 유쾌, 통쾌, 상쾌라는 이상한 논리로 면죄부를 얻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작금의 흐름에 도도하게 일갈을 내 지르는 글이었습니다.
仁兄. 흔히 말하기를 좌백. 전동조. 설봉을 논하더군요. 그러나 그분들이 대중소설을 썼던 소설가 출신들이라는, 즉 그분들의 작품이 소설의 기본원칙에 나름대로 충실하다는 사실이 가볍게 다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아쉬웠습니다.
김용의 성공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군림천하가 주목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용대운님은 분명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분야의 공부를 했으나 군림천하는 소설의 이론에 맞게 쓰인 글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仁兄.
저는 허담이라는 작가의 ‘신기루’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그 생각들의 이유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는지는 단언 할 수 없지만 부인 할 수도 없습니다. 글이란 종종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완성되어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 글을 어디에서인가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리고 글을 끝까지 읽지 않고 어떻게 평을 하느냐는 시비(?)에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매년 새해 첫 날의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신춘문예당선작들 뒤에는 수많은(만 단위가 넘는,) 낙선작들이 있는 사실을 아느냐고, 아니 심사 위원들이 첫 페이지부터 걸리는 글 들은 던져버린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끝까지 살아남은 10 여 편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 읽은 후 수많은 토론을(때론 격론을)거쳐서 결정 된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는 말입니다.
仁兄.
제주도에는 오래전부터 ‘이어도’라는 꿈의 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에는 ‘오아시스’의 이야기처럼 꿈의 이야기가 있지요. 이태리 남부 항구도시에는 ‘끼암볼로’라는 사기성 짙은, 그러나 사기가 아니라고 믿어주는 이야기가 있다지요. 우리 인간이 곤고함을 잊기 위해서 술잔을 기울이는 행위 또한 그 결말을 알면서도 신기루를 갈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뉴스에서 종종 ‘피라미드’ 사기사건이나 부동산 투자 사기사건, 혹은 ‘바다이야기’ 같은, 차분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피 할 수 있었을 듯한 사건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 또한 ‘신기루’라는 환상을 꿈꾸는 우리의 본능(?)이 빚어낸 사건들은 아닐까요?
仁兄.
우리 인생에서 내일을 수도 없이 꿈꾸고 설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내일이 확실하게 우리에게 약속해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내일이 약속해준 것은 단 하나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 ‘신기루’를 꿈꾸고 있습니다.
仁兄.
저는 이 글을 읽는 동안 내내 어린왕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paulo coelho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산티아고’를 떠올렸습니다. 물론 어린왕자나 산티아고가 찾는 것이 반드시 신기루로 향하는 무림인들이 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마저도 반드시 다르다는 말 또한 할 수가 없겠지요. 그리고 저는 ‘스필벅’ 현상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는 종종 수많은 양떼들이 이유 없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무리에서 갑자기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이유도 없이 다른 놈들도 따라 뛴다는군요. 그래서 수 만 마리의 양떼가 달리다가 벼랑에 이르러 떨어져 죽는 현상을 ‘스필벅’ 현상이라고 한다더군요. 우리 사회의 근거 없는 지역감정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지적했을 경우 일부에서 보여 온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행태들 또한 ‘스필벅’ 현상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참으로 드물게 보이는 수작중의 수작이었습니다. 흔히 묘사를 설명할 때 이효석의 ‘메밀 꽃필 무렵’을 많이 이야기 하는데 이 작품 또한 나쁘지 않더군요.
‘고도 낙양의 정취가 열린 창을 통해 은은하게 밀려들어 오는’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쉬움 하나를 들자면 바로 이것이지요. 2, 3권에 나오는 장면인데 ‘십대괴객’이 분명 9파 1방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무예를 지니고 있다고 몇 차례 설명하고 있지요.
즉,
1. 십대괴객은 9파 1방의 장로급에 해당한다.
2. 점창은 9파 1방에서 밀려난 상태다.
3. 십대괴객 중에서 묘왕 충이수는 무공과 지혜에서도 뛰어난 자이다.
4. 점창파 최고 고수는 남유교이다.
그런데 2권 222~227에 걸쳐서 묘왕 충이수와 남유교의 대결 장면이 나오는데 분명 1초만이라고 명시는 되어 있지 않지만, (단 한 수에) 충이수가 무기를 앗기고 상처를 입은 채 도망을 치더군요. 이 부분을 저는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즉, 남교유가 장로급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는데 단 한 수에 패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아주 좋은 작품이기에 이 글을 소개해준 仁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어서 이 글을 급히 드립니다.
끝으로 작가님에게 부탁의 말씀을 올립니다.
1. 다음 편을 얼른 사서 짝을 맞추고 싶으니 열심히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절대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3.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무협소설 정도의 분량이라면 이제는, 아니 진즉 대하소설다운 대하소설이 나왔어야 한다고 봅니다. 늘 주인공에서 시작해서 주인공에서 끝나는 형식보다는 주인공을 따라가던 작가의 시선이 제2 제3의 인물에서도 한 동안 머물러 있는, 바꿔 말하자면 전체분량 중 상당부분은 다른 인물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형식의 글을 써 주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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