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케인 - The Oblivion War
작가 : RaifSam
출판사 : 없음(미출판)
무협, 현대 판타지에는 식견이 없어 일반적인 판타지물을 주로 읽는 독자입니다. 지나가면서 비평 요청글을 보고 글을 작성하게 됐습니다.
초면에 솔직히 비평을 해야 하나 살짝 걱정이 되긴 한데, 비평 요청을 직접 하셨으니 그만큼의 각오를 가지고 계시리라 싶어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 인상: 따개가 끊어져 나간 통조림 같은 느낌, 뜯을 수도 먹을 수도 없다!
아무리 맛있는 통조림이라도 뚜껑이 열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듯, 도입부에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소설은 감상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도입부에 제공돼야 할 정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지실 수 있는데, 그리 거창한 수준은 아닙니다. 프롤로그나 1~3화 분량으로 (1) 주인공이 누구냐 (2) 주인공은 어떤 갈등과 마주하고 있냐(누구하고 싸우고 있냐) 이 두 가지 정보를 제대로 제공해주고, 그다음 1권 분량으로 (3) 현재 주인공의 상황은 어떠한가 (4) 주인공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하려 하는가(어떤 방법으로 싸워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정보를 풀어주면 됩니다.
물론 ‘저 네 가지 정보를 제공해야 된다’는 것은 제 주장일 뿐이고, 권위 있는 학설이나 통계를 근거로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경험 상, 저 네 가지 정보를 초반부터 잘 풀어낸 소설을 초반부터 읽다 그만 둔 적은 없었습니다.
예제) 삼국지연의 1권.(버전이 많으니 이문열 삼국지 기준)
주인공은? 일단 유비/ 뭐하고 싸우나? 한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도적과 군벌/ 지금 상황은? 킹왕짱 관우와 장비를 부하로 둠. 그래봤자 별볼일 없는 세력 /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반동탁군에 가담해 싸우고 보자
하지만 아케인은.... 읽다 당황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 본격적인 비평: 무엇이 가장 마음에 걸렸나?
(1) 주인공이 누구냐는 정보가 불명확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초반에 ‘엘리샤’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3화인가 가서 뜬금없이 ‘나’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1인칭 시점 서술이 나오길래 “어래 주인공 이름이 뭐였지?”라는 생각이 들어 한참 찾아봤어요.
그러고도 못 찾아서 한참 고민하다가... 작품 설명에 ‘세상의 밸런스를 지키기 위한 비밀 조직 아케인. (중략) 앨리샤와 앨리스는 전쟁을 막고 오더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라고 적힌 걸 보고 “아, 나=엘리샤였구나!”라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솔직히 작가님. 너무하잖아요. ㅠㅠ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니. 물론 프롤로그에 핵심 사건을 부각하기 위해 주인공의 비중을 줄이거나 언급을 안 하는 연출기법은 있습니다만, 그런 기법을 쓰는 소설들도 프롤로그 끝나면 주인공이 누구인지 충분히 설명해준다고요. 인상은 어떤지, 어떤 처지인지, 왜 싸움에 나섰는지 등등. (스토리 때문에 싸움에 나선 이유를 나중에 가르쳐주는 소설도 있긴 하지만)
하지만 아케인은 엘리샤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전개되지 않고 전쟁씬으로 들어가버렸죠. 덕분에 누가 주인공인지 혼동이 돼서 처음 읽을 때 전혀 몰입할 수 없었습니다.
(2) 주인공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왜 싸우는지 파악하기 난해했다
소설의 핵심적인 개념인 ‘비밀 조직 아케인’만 해도 그렇습니다. 2화인가 거기서 한 문단으로 나열식 설명을 하고 끝내셨더군요. 속독하는 독자라면 그 부분을 주의깊게 안 보고 넘어갈 가능성도 있는데...
덤으로 아케인의 목표가 영 추상적이라서, 나열식 서술을 봐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밸런스를 수호하는 집단’이란 걸 봐서는 현실의 UN군 같아 보이긴 한데, 아케인이 원하는 ‘세상의 밸런스’는 무엇이고, 어느 놈이 세상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길래 아케인이란 집단이 창설돼야 했나 등등의 의문이 떠올라서요.
덕분에 ‘주인공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다’ ‘주인공이 어떤 대상과 싸워야 한다’와 관련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해 몰입을 못했습니다.
오히려 비밀 조직 아케인을 설명할 때 스토리텔링 기법(상대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들려주는 방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비밀 조직 아케인이 어린 시절의 엘리샤를 구출하면서 ‘우리는 어떤 조직이고 하는 일은 무엇이다’라고 알려주는 스토리를 더한다든지, 1화 분량으로 짤막하게 세상의 밸런스를 고치는 예시를 보여준다든지 등등.
3. 그럼 어떻게 하면 몰입에 필요한 정보를 쉽게 전달할 수 있나?
독자들의 몰입을 돕는 정보를 제공하려면, 지금처럼 전쟁 이야기로 바로 넘어가는 플롯을 기획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 초반부 에피소드가 독자의 이해를 돕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플롯을 예시로 든다면
프롤로그: 필멸자 시절의 엘리샤가 아케인에게 구조되는(혹은 선택받는) 이야기
-> 아케인이 필멸자를 거둬 조직원을 보충한다는 설정을 드러낼 겸, 아케인이 엘리샤를 선택한 이유를 제시해 주인공 엘리샤의 특별함을 강조함으로써 ‘얘가 주인공’이라고 도장을 콱 찍어버리기 위한 편.
1편: 아케인의 일원이 된 엘리샤가 선임에게 교육 받는 이야기
-> 아케인이 뭐하는 조직이고 주인공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는 점을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한 편
2편: 처음으로 적을 만난 이야기
-> 주인공이 앞으로 싸워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편
3편: 처음 만난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 아군에게 구조받는 이야기
-> 주인공의 동료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한 편. 만약 여캐를 등장시키면 ‘이 작품의 히로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한 편’으로도 활용할 수 있음
뭐 이런 식으로요. 급하게 떠올리는대로 쓴 거니 그냥 참조만 하세요. (판타지나 만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스테디셀러급 플롯. 거진 클리셰급) 그리고 ‘저렇게 고쳐달라’는 뜻으로 쓴 거 절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제 설명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스테디셀러급 플롯에 맞춰 예시를 들었을 뿐입니다. 작가님은 본인 판단에 따라 가고 싶은 길을 가시면 됩니다.
4. 그외 자잘한 거
저는 시점 변경 자체를 금기시하지는 않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작성하던 중, 어떤 캐릭터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1인칭 시점으로 전환하는 시도는 좋은 연출 기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케인의 시점 변경 방식은 글쎄... 전지적 시점으로 써도 전혀 문제가 없고, 1인칭 시점으로 바꿔서 득을 얻을만한 구간에서 이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전투씬에서 1인칭 시점으로 바꾼다든지 등등. 특별히 극적인 서술을 하지 않는다면 시점을 통일하는 편이 독자들에게 좋아요.
그외 전투씬이나 다른 요소들은 분량이 쌓인 뒤에야 평가 가능할 듯 합니다. 초면에 다소 거친 비평글을 써서 실례했네요. 다만 비평 요청을 하신 분이라면 충분히 각오를 다지셨을테니,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이런 비평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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