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양파와 죽순?

작성자
Lv.6 박상준1
작성
11.01.25 04:13
조회
761

#1

그가 서안 옆에 놓인 거치대에서 가만히 검을 빼 들었다.

여기까지 쓰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문다. 아무래도 뭔가 미진하단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거치대.’ 이거 때문인가. 군 시절, 내무반 문 옆에서 단 한 번도 옮겨지지 않고 꾸준히 자릴 지키고 있던 소총거치대가 언뜻 떠오른다. 검이나 총이나 ‘거치’해 두는 ‘대’면 다 거치대지, 뭐 별 게 있을라고. 걸개라고 고치면 좀 나으려나. 그래도 영판 개운치가 않다. 젠장, 이래선 또 밤새 한 줄 넘기기 힘들 거 같다. 애먼 담배만 뻑뻑 빨아댄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내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내 몸이 허락할 때, 나는 내 맘에 드는 글을 쓸 수가 있고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고 김훈이 말했던가. 하지만 나는 누구처럼 육필을 고수하지도 않고, 거기 대한 그럴듯한 철학 같은 것도 없다. 게다가 난 베스트셀러작가도 아니고 작은 문학상도 한번 못 받아본 ‘듣보잡’이다. 그런데도 늘 이런 식이다.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는’ 건 김훈 같은 대가나 나 같은 ‘듣보잡’이나 매한가지인가 보다. 누구는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줄도 못 쓴다지만, 나는 말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줄도 나가질 못 한다. 빌어먹을 짓이다.

壁上에 걸린 칼이 보믜가 나단말가/ 功 업시 늙어가니 俗節 업시 안잣노라/ 어즈버 丙子 國恥를 씨서 볼가 하노라

결국 시조 한 수를 찾아낸다. 우리 조상들은 칼을 보통 바람벽에 걸어놓았다. “박원종은 한참 동안 유순정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벽상에 걸린 환도를 빼어 들고……” 월탄 선생도 이렇게 묘사했다.

그런데 사극 같은 걸 보면, 이슥한 밤에 책 읽던 양반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그게 거치대이든 걸개이든, 목재로 짜인 보관대에서 칼을 빼 들지, 벽에서 끌러 내리진 않잖은가. 박물관에서도 검은 그렇게 보관하고 있잖은가. 또 여기저기 알아보니, 검을 그렇게 두는 건 일본식이란다. 그래도 검을 엉거주춤 벽에서 끌러 내리는 건 뭔가 좀 ‘가오’가 안 선다. 다시 고민이다. 젠장맞을.

“문장을 짓는 사람은 아무리 명칭이 비루해도 이를 꺼리지 아니하고, 아무리 실상이 속되어도 이를 은폐하지 말아야 하오. 맹자에, 성은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이름은 독자적인 것이다, 라고 했듯이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은 독자적인 것이다, 라고 하겠소.” 연암 선생이 창애 선생에게 했던 비평 한마디가 슬쩍 떠오른다. 모양이 좀 빠지더라도 거치대는 벽상이라고 고쳐야겠다.

창애는 그 비평 한마디에 연암과 의절했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稿)’라고 날 선 맹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 글 쓴다는 거, 지랄 맞을 짓이다.

#2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듯 찔끔찔끔 속내를 내비치면서, 이리저리 에둘러치며 사람을 저울질해대는데 진력날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또 줄담배질이다. ‘양파’ 껍질 벗겨내듯, 하고 쓰면 딱 어울릴 거 같은데 숙종 당대 조선에 양파가 있을 리 없다. 양파가 다 원망스럽다. 하지만 양파는 죄가 없다. 내가 문제이다.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다. 얼렁뚱땅 설렁설렁 인생을 허비하듯 사는 놈이 꼭 이럴 때만 심각하고 예민하게 군다. 미칠 노릇이다.

다산 선생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쓴 두 번째 편지에서, 예서 공부는 파뿌리 껍질을 벗겨내는 것과 같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낸다. 그래도 여전히 석연찮다.

‘경세유표’에서 후한 때 학자 정현의 주례 주석을 비판하면서 다산 선생이 쓴 구절을 결국 찾아낸다.

“국택ㆍ원전ㆍ근교ㆍ원교는 안으로부터 바깥까지 문장이 구슬을 꿴 듯한데 만약 원전을 기내 과원과 채포의 통칭이라 한다면 장법(章法)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중심지는 가장 박해서 부세가 없고 다음 바깥은 경한 쪽을 따라 20분의 1로 하고, 그 다음 바깥은 중간으로 하여 10분의 1로 하고, 또 다음 바깥은 조금 중하게 20분의 3으로 하며, 또 그 다음 바깥은 가장 중하게 10분의 2로 했다. 층층이 감쌌고 마디마디 차등을 둔 것은 죽순 껍질이 겹겹이 싸이고, 파 뿌리의 흰 부분이 겹친 것 같아서 그 제도가 아주 묘하고 그 뜻이 지극히 정밀했는데, 정현의 말이 한 번 나오자 그 법이 무너지고 혼란해져서 상고하고 시행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층층이 감쌌고 마디마디 차등을 둔 것은 죽순 껍질이 겹겹이 싸이고, 파 뿌리의 흰 부분이 겹친 것 같아서(層層包裹 節節差等 如竹籜之苞靑 如葱根之疊白)." 캬! 우리 조상은, 최소한 다산 선생은 양파 대신 죽순과 파뿌리를 이런 식의 비유에 썼구나. 그런데 내가 죽순을 먹어본 적이 있던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없는 거 같기도 하다. 껍질 그대로인 죽순을 본 적 있던가? 없다. 지금 어디 가면 맨 죽순을 사서 까볼 수 있을까. 편의점에는 당연히 없겠지. 미친 놈. 새벽 세 시다.

한 켜 한 켜 죽순 꺼풀 벗겨내듯이……. 그런데 별로다. 호흡도 가쁘고 문장이 뭔가 맛이 안 산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넣다가 뺐다가. 에라,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그냥 두자. 다산 선생께 미안하지도 않냐.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 훌쩍 지울지 모를 일이다. 몇 날 며칠 끙끙 앓다 겨우 쓴 한 줄도 가차 없이 지워 없앤다. 밥 먹다가 문득 후다닥 달려가 뭐에 홀린 듯 파일을 열고 이걸 내가 왜 지웠을까, 도로 고쳐 넣는다. 그러곤 또 언젠가 싹 지워버린다.  

문학은 구원이라는 등의 숭고한 말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 천형인 것만은 분명하다. 신병 앓는 무당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지랄이란 말이냐.

하늘이 내게만 부여한 거룩한 사명도 아니고, 밥벌이 안 되면 때려 쳐야 한다. 내가 한창 문청도 아니고.

모든 시에는 고통이 배어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시가 되는 건 아니라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그저 우둔한 문재를 탓할 뿐이다. 그러나 우선은 썼다 지웠다 애면글면 살아볼 일이다. 글 쓴다는 거, 천하에 고약한 지랄병이다. 어쩌면 천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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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연재- 검선>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 당대 제일의 검객이라던 김체건과 영조 때 검선이라고 불렸던 그의 아들 광택의 이야기입니다. 2부작으로, 1부는 김체건 2부는 김광택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쓴다고 쓰고 재미있다고도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은 거 같긴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실하게(? 문피아에서 보통 말하는 성실연재의 성실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곤 있습니다.  

http://www.munpia.com/bbs/zboard.php?id=bn_780


Comment ' 1

  • 작성자
    Lv.24 寒夜
    작성일
    11.01.25 16:14
    No. 1

    홍강합니다.
    취향에 맞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노력과 피와 땀으로 쓴, 명품같은 소설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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