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지는 여느 때보다 길게 썼습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의 추신입니다.
전보 아니라 편지 맞습니다.
형식에 얽매일 필요 없는 편지를 쓰면서도 분명하고 간결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을 추구했었나 봅니다.
대학시절 은사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똑 같이 내용 없을 바에야 짧은 게 낫지.”
기말 과제를 내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채점하기 귀찮아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의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소설 작법에 관한 이론서는 셀 수 없이 많죠.
중첩되는 내용도 많지만 서로 상충하는 내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소설론뿐 아니라 제가 아는 모든 문장론에 공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파스칼이 말한 그 부분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저도 여러 이론서 중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스티븐 킹도 다른 사람들처럼 ‘위대한 작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종(種) 자체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 자신이 하늘 높이 구름 위에 올라 앉아 있다고 믿지는 않거든요.
글 못 쓰는 사람을 벌레 보듯 하지도 않……는 건 아니지만 좀 덜합니다.
아무래도 그 역시 장르 문학 작가이기 때문이겠죠.
이야기가 산으로 가네요.
본론으로 돌아가서요,
스티븐 킹이 무협지 주인공이 기연을 만나듯이 첫 번째 도약을 이룬 계기는 한 장의 친절한(?) 쪽지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글로 옮겨 닥치는 대로 기고했는데, 그 중 한 편집자가 어린 친구가 기특했는지 조언을 해준 거죠.
‘원고 = 초고 – 10%’
네.
파스칼은 그날따라 10%를 줄일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스티븐 킹은 이야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묻혀있는 화석처럼 발굴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전히 습작 중이지만, 저는 매번 2~30% 정도를 줄일 생각으로 초고를 씁니다.
세상에는 수정이 거의 필요 없는 초고를 만들어내는 고수들도 넘쳐나지만,
저처럼 어설픈 고고학자는 손바닥만한 화석 하나가 묻혀 있는 곳 주변을 포크레인으로 듬뿍 퍼내서 화석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돌을 깨내고 꼼꼼히 흙을 털어내야 하거든요.
초고를 쓰는 건 그 무엇보다도 즐거운 작업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묻혀있는지 궁금해서 열심히 땅을 파지요.
하지만 그 화석을 온전히 드러내는 수정작업은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호밀 밭의 파수꾼’의 저자 J. D. 샐린저는 소설을 한 편 쓰자마자 자기 금고로 쳐 넣어 버리고 곧바로 다음 소설을 시작한다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고를 쓰는 것은 쓰는 이를 위한 일이고, 수정작업은 읽는 이를 위한 일인 것 같아요.
이것이 지금 저의 딜레마입니다.
수정작업은 초고를 쓰고 곧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스티븐 킹은 최소한 6주 이상 묵혀 두었다가, 자기가 쓴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다음에 수정하라고 말하죠. 그 동안 다른 걸 쓰고요.
그런데 저는 10주 이상 내버려 둬야 제가 쓴 글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니까, 10주 이상 지나야 그때부터 제 글이 부끄러워지더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제가 연재하는 게 그날그날 휘갈긴 초고라는 겁니다.
장르 소설 조판 양식에 따르면 한 권에 15만 자 정도라기에 한 권에 20만 자를 기준으로 썼습니다. 5만 자 줄일 생각으로요.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초고는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왜 남에게 보이느냔 말이죠.
사실 그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욱 신나서 쓰게 되거든요.
발굴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단축됩니다.
그리고 발굴한 것을 빨리 자랑하고 싶은 거겠죠.
완전 하수네요.
그렇다고 다 쓰고 다 수정한 다음에 남들에게 보일 수도 없습니다.
장르 소설이라는 게 워낙 권 수가 많으니까요.
한 세 권 쓰고, 네 권째 쓰면서 첫 번째 쓴 것을 수정하고 그것을 공개했어야 하지 않았나, 뒤늦게 후회 중입니다.
연참대전에서 자진 하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창 축제 중인데 초치는 것 같지만, 연참대전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기발한 아이디어와 설정, 스토리만 재미있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순수 문학이 장르 문학을 무시하기도 전에, 장르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가 먼저 장르 문학을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머리 속이 복잡하네요.
초고를 써서 올리는 이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거든요.
계속 즐겁고 싶은 마음과, 10주 전에 쓴 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시점이 맞물려, 답답한 마음에 늘어놓은 넋두리입니다.
덧.
한담이 조금 깁니다.
이제 자야 해서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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