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떤 면에서는 '소망하는 우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드문 타입의 캐릭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이런 타입의 캐릭터는 모든 사정을 알고 있을 때 참 안타깝기까지 할 정도로 못 말리는 캐릭터들입니다.
이런 경향은 지금의 <은빛어비스>나 <잃어버린 이름>의 위버보다, <희망찬>의 은결이 더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런 '소망하는 우자'들은 절대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존재 자체가 '소망'으로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은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존재란 마음 정도로 흔들릴 정도로 가볍지 않고, 그 존재가 소망 자체인 것처럼 되어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 자신의 소망이 옳은지 그른지는 관계없습니다. 현명한 조언도 필요없습니다.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도 관계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절망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어떤 절망을 맛보게 될지…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그릇되었으며, 절대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는 것 모두를 이해하더라도 그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멈추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소망이 아무리 하찮고, 왜소하고, 어리석더라도 그들에게는 그것밖에 없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소망을 가지고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법밖에 모릅니다. 그 외의 방식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앞만 보며, 그 앞에 무엇이 있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나갑니다. 다른 길은 절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고, 지금 선택한 길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물이 숨쉬기 위한 공기가 사라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자'인 것입니다. 얼마나 머리가 좋건 관계없습니다. 어리석다, 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계속해서 달려나가는 것이기에, 아니 달려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은 결국 우자인 겁니다. 하나의 개념인 것처럼, 설령 세상의 풍파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담겨있던 마음조차 잃어버려도, 마치 그것이 의무인 양 묵묵히 이행하려 나가아갈 뿐인 가련한 존재.
이 이야기는 어쩌면 그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결코 이룰 수 없음에도, 이루기 위해 걸어가는 소망하는 우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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