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작성자
Lv.59 아침안개
작성
06.05.01 23:14
조회
821

아직 초반부라서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될듯 모르지만 재미있더군요. ^^ 그래서 실제로 연개소문은 어땠을까... 라는 소박한 의문에 역사사이트를 훝어보는 중 눈에 띄는 글이 있어서 퍼옵니다. 출처는 'www.coo2.net - 네티즌 자유게시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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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규 (2006-04-30 20:29:01, Hit : 160, Vote : 1)

  연개소문에 대한 나의 생각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여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사를 자국사라 해석하고, 빼앗아가고 있다. 이는 김씨가 이씨의 집에 살고 있으니 이씨의 족보는 내 것이다라는 억지 주장과도 같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 국민들의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고구려와 관련된 드라마(연개소문, 주몽, 대조영, 태왕사신기:개인적으로 맘에 안드는 작품이 바로 이 태왕사신기이다. 김 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 모방, 어처구니 없는 배우 설정,, 배용준이 광개토태왕 역을 제대로 소화할 것 같나?)들이 방영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고구려 그것도 고구려 말기의 집권자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고구려를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차지한 독재자라 치부하고 그를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있다. 고구려사를 새롭게 쓰자고 하는 현 강단학계도 연개소문에 대해 7세기 동아시아의 급변적 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그것에 맞추어 비판하고 있으니 당연할 수 밖에...

하지만 필자는 연개소문은 새롭게 재평가 되어야 할 위인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필자가 존경하는 위인 중에 몇 안되는 위인이다.

만약 연개소문이 정변에 실패하고 영류왕이 계속 정권을 잡았더라도, 고구려는 이미 외교적으로 고립이 되어 있었고 이후 당태종의 동북아 제패야심에 의해 결국 사대의 예를 갖추다가 결국 멸망을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대개 연개소문에 대해 비판적 시각과 평가를 내리는자들의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다.

/ 영류왕을 시해한점...

/ 그로 인해 당에 침략에 구실을 줬다고 이유를 되는 점

/ 독재를 단행했다는 점

/ 고구려 멸망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들을

/ 마지막으로 경직된 외교정책

위에 열거한 것들을 공통으로 든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과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왕을 시해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포악한 사람, 영류왕은 그런 포악한 사람에게 시해당한 불쌍한 군주, 평화를 사랑한 군주로 알고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당시 영류왕은 고구려의 외교노선과 반하는 외교노선을 택했고, 국제정세에도 어두운 멍청한 군주였다.

일례로 그는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를 당에 보냈다. 국가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를 보낸 임금이 제정신이라 생각하는가? 게다가 당시 당이 구축한 세계질서, 주변 북방민족과의 관계등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영류왕은 중요한 국제정세에 둔감했고 고구려는 점차 위기를 맞이할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 시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돌궐이 당에 멸망하자 당에 사신을 보내 축하를 했다. 이는 선대왕인 영양태왕과 대비된다. 영양태왕은 수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주변 국가와의 연대를 돈독히 했는데 영류왕은 자신의 잠재 적국인 당과의 전쟁시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돌궐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 축하나 하는 한심한 추태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그는 고구려의 상징인 전승기념관 경관을 헐어버리고, 진대덕이 내방했을 때 진대덕으로 하여금 고구려 기밀을 알릴 정도(물론 직접 알린 것은 아니다. 진대덕이 뇌물로 고구려 관리를 매수하여 고구려의 기밀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자들을 관리로 둔 영류왕은 고구려 기밀을 알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간신배들을 등용한 군주였다)로 멍청한 임금이었다. 불안한 국제정세와 멍청한 군주의 실정....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멍청한 군주 영류왕을 시해한 것이다.

고구려 멸망이 연개소문 단 한 사람에게만 있을까? 물론 모든 권력이 연개소문에게 집중됨으로써,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간의 다툼으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멸망 징조는 선대왕인 영류왕의 실정으로 인한 내부문제에서 싹틔웠다고 볼 수 있다. 선대의 영류왕의 실정으로 인한 고구려 멸망의 근본적 내부문제와 그로 인한 멸망에 단서를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을 핵심문제로 부각 7세기 한반도에 운명을 패인을 모두 연개소문에 뒤집어 쒸우려는 속사정도 결코 없다고는 볼수 없다.

역사에는 사면되고 복권되어야 할 위인들이 많다. 단지 패자라는 이유로 오욕을 뒤집어쓴 위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영웅이 바로 연개소문이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무인이자, 정신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 한반도는 당나라의 야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천가한이라 자처하며 주변 유목종족을 정복하여 동아시아 재패라는 망상에 꿈꾼 그의 야욕을 잠재운 연개소문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나라의 역사는 중화족의 더러운 칼 날 아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미친 아이 당 태종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연개소문 밖에 없었다. 신채호가 평가한 대로 그는 조선 4천년 역사상 제일 가는 영웅이었다. 민족을 구한 영웅을 난신적자로 표현하는 작자들의 붓장난에 놀아나야 되는가?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대화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강단학계의 주관적, 독단적 역사 해석이 과연 역사를 옳게 보는가? 이는 역사가 가진 속성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어긋난다. 이제부터 우리는 연개소문 그를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정립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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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규 (2006-04-30 20:39:38, Hit : 271, Vote : 2)

  다시보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을 다시 보자

1. 기존의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제고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고구려의 적국이었던 신라와 중국 측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러니 이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특히 중국의 역사서술 특징은 춘추필법(자국의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기고, 중국의 역사는 높이고 외국 역사는 깎아내리는 전형적인 역사왜곡 수법)이다. 그러니 중국 특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괴멸시킨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한 가지 웃긴 것은 당 태종이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자, 안시성주가 연개소문 정변이 일어났을 때도 저항을 하여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연개소문이 안시성주의 성주 작위를 수락하고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여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걸 우회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소가 웃을 노릇이다. 연개소문에 대항하던 안시성주가 어찌 당에 저항을 하겠는가? 또한 연개소문 정권을 안시성주가 반대했다면,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을까? 이는 한 마디로 말해 자신들의 패전을 숨기려는 중국인들의 못된 습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중국 측의 기록에 답습하지 말고 옥석을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는 연개소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義表雄偉)하고 의기호일(意忌豪逸)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 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緯)로 삼고, 하늘을 경(經)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온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없이 모두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연개소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왕안석)와 국사를 의논할 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째서 이기지 못했는가?'하니 왕개보는 '개소문이 비상(飛上)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고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연개소문은 무자비하고 포악한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국난에 처한 고구려를 구한 영웅이자., 부하들과 백성들을 사랑한 정치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는 역사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법이다. 승자인 당과 신라는 자신들의 기록을 남길 때 그들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을 흉포한 인물로 깎아내렸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껏 알고있는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지양하고 객관적으로 연개소문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연개소문과 다섯자루의 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씩이나 차고 다녔다는 것에 대해 독재자로서의 위엄과 과시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니는 것이 연개소문이 독재자의 증거가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독재만 생각했지, 왜 그가 칼을 다섯 자루 씩이나 차고 다녔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연개소문은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그 답은 바로 『한원』이라는 사서에 있다. 『한원』 「고려조」에는 고구려 남자들이 허리에 은띠를 차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이를 밝혀줄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구당서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혼인 전 자제가 경당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나라이니, 아무래도 일반 백성들의 무술 연마에 사용했을 것이다. 즉 이 칼은 장식품이 아니라 생활상의 필요와 함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등 각종 무술을 연마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는 것은 삼국사기 개소문전에 기록된 대로 독재자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 남성들의 평범한 일상사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독재자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3.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 요청을 거절했나?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신라가 구원요청을 하러왔을 때 신라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한 걸 가지고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그가 왜 무슨 목적으로 신라의 구원을 거절했으며 왜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달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을 거절했을까?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구원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돌려주는 문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의 안보와도 직결되는 백제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더 큰 이득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는 신라 대신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이 643년 11월에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취해 신라가 당과 통하는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가 철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었음을 가리키는 기록이다. 양국이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 출병을 했다는 것은 643년 11월보다 이른 시기에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협상하러 간다는 사실을 백제에서 알았다면, 백제 또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협상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김춘추에 대한 정보를 얻게된 것은 혹자(或者)를 통해서이다. 혹자, 즉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필시 고구려인이 아닌 백제인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갔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신라간의 협상을 결렬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김춘추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은 크다. 이런 가능성을 좇는다면 연개소문은 백제와 신라 양국을 저울질하면서 어느쪽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한 가를 판단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당과 일전을 겨룰 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맹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국가가 백제였다. 당시 백제는 신라보다 국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할만큼 해양강국이었다.

만약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과 연합을 할 것이고, 그리 된다면 고구려는 서해 상에서 적의 군대를 막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안보 차원에서 백제를 선택하는 것이 신라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함으로써, 자연히 왜국과의 교섭 또한 활발해졌다.10)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을 맺자, 신라가 왜국과 교섭할 것을 우려해 왜국과의 외교 정상화에도 빠르게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한가지 말해둘 것은 김춘추가 거짓으로 고구려의 옛땅을 돌려준다는 편지로 고구려로부터 빠져나온 것을 가지고 연개소문을 구전 설화인 구토설화에 나오는 용왕과 비유하여 어리석은 인물이라 치부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당의 대군을 물리친 전략의 귀재인 연개소문이 그깟 한낱 어린애의 말장난을 믿었으랴...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놓아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춘추는 협상실패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고구려에 가기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게다가 고구려인의 반(反) 신라 감정이 고조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전선이 구축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그를 놓아준 것이며, 협상을 통해 충분한 실익을 얻은 셈이었다.

4. 연개소문, 만리장성을 넘어 저 멀리 강소성까지 가다

안시성 싸움에서 패배한 당군은 결국 퇴각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지금의 북경지방을 차지했다는 전설과 함께 연개소문이 저 멀리 산동성과 강소성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는 전설이 내려져오고 있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상곡, 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당 고종)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渝關:산해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거느리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중략)

“연개소문이 지나(支那: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외 7리지(里地)의 황량대(詤糧臺)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 · 직예(直隸:하북성)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懸)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高麗營) 유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채호는 고려영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보았다. 『북경 순의현지』에는 당나라 때 지금의 북경에 고구려인이 이주해왔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있다.

연개소문이 북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을 넘어야했다. 그런데 당시 만리장성은 그리 대단한 장벽이 아니었다. 5호 16국시대, 남북조 시댕 많은 북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리장성같이 일직선상에 쌓은 성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적군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성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기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었을 것이다.

최근 북경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 정복을 운운하던 당 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권 안에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런데 위의 전설 말고 산동성과 강소성에는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이 무려 6가지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① 산동성 봉래시의 전설: 봉래 인근에서 당 태종과 연개소문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 때 당태종의 형이 전사를 한다

② 산동성 즉묵시의 전설: 당 태종이 산동성 즉묵 마산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힐 뻔 할 때 신라출신 용양장군 김걸이 당 태종을 구하고 자신은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는 전설

③ 강소성 비주의 전설: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군 간의 격전

④ 강소성 숙천의 전설: 연개소문이 당의 설인귀군과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는 전설

⑤ 강소성 염성: 염성 건호현에는 몽롱탑(蒙朧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 우물에 숨어 살아났는데 나중에 이 은공을 잊지 못해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어둡고 어려움(朦)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 줘 목숨을 건진대서 몽롱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⑥ 강소성 금호: 고려성이 있는 지역

위의 전설들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수군으로 중원의 산동.강소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략을 했으며이에 당태종은 친히 정벌코자..나섰지만도리어 연개소문에 전략에 휘말려 당태종 자신이 죽을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위 전설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 지역에 한 인물에 대해 그것도 6가지나 내려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현학계에서는 이런 사실을 얼토망토 않은 사실이며 또한 기록에전하는 바가 전혀 없다 하여 한같 재야사학의 엉뚱한 주장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너무 많다. 위의 전설 말고 어니하, 독목관, 분하만 등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은 중국 각지에 퍼져있다.

중국은 소위 춘추필법이라고, 자국의 불리한 역사는 기술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와 후한의 대전쟁인 좌원대전 역시 기록하지 않은 그들이 과연 그들이 우러러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겼다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연개소문이 고구려 수군을 통한 중원 정벌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흔히 고구려하면 막강한 기마병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시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수군을 활용하여 백제와 후연을 굴복시켰고, 고수대전 시 건무(영류왕)는 수군으로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몰살시켰다. 게다가 보장왕 때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교역을 방해했는데 이는 강력한 수군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연개소문의 수군을 통한 중원에 심장부로 통할수 잇는 요충지산동과 강소성일대 침공은 그냥 전설일까? 전설역시도 그 이유와 원인이 있으니전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지기 때문에 오히려 위와 같은 전설, 신화 등이 그 역사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본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리고 연개소문이 위 지역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떨쳤으면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저 멀리 중국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에 나타날까?

위와 같은 전설을 단순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분명 연개소문이 위 지역에 쳐들어갔고, 그랬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전설이 남아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어니하라는 전설에서는 어니하에서 당 태종의 말이 진흙수렁에 빠져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사로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강소성 몽룡탑 동북방에 세니하라는 강이 있는데 이 세니하가 어니하에 등장하는 어니하는 아닐까?

참고로 현재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한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도망가는 당 태종을 추격하여 결국 당 태종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성에서 당 태종의 항복을 받고, 하북, 산서, 산동, 양쯔강 이북을 전쟁 배상으로 받아냈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한단고기는 위서라며 위 내용은 거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당 태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고구려 사신이 가지고 온 글 또한 궤변으로 가득찼음, 당나라 사신을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고구려가 전승국으로서, 당에게 전쟁 배상을 물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승국인 고구려가 패전국인 당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당의 영토를 이양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노릇이다.

즉, 당 태종의 항복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구려가 당의 영토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였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혹시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지는 않았을까? 물론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려는 저의에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그들의 기록대로 교만하고 오만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어니하에 빠진 당 태종이라는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어니하에서 당 태종을 사로잡아 당 태종을 위협하며 항복문서 쓰라고 강요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런 내용의 전설이 남아, 소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이 역대 최고의 황제로 숭상하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전설이 내려올 수 있을까?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넒은 중원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 태종의 항복기사를 다룬 『한단고기』는 그 내용 자체가 역사적 사실면에서 세인으로부터 찬반론을 일으키고 있고, 요동침공 관련 기사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 태종과 요동침공 관련 기사의 석연찮은 태도나 삼국사기의 미묘한 의문 등을 보건대, 『한단고기』의 관련 기사를 무시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검토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연개소문을 중국인의, 신라인의, 유학자의 눈이 아닌 고구려인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기상을, 고구려인의 발자취를  저 멀리 중원에 떨친 일대의 호걸이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고당대전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패전함으로써, 동방지역(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동쪽지역)을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 당 중심의 천하질서로 묶으려던 당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동방의 패자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고당대전의 승리는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당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이야 말로 “조선 4천년 역사상 첫째 가는 영웅”이라 할 만하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덕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서병국. 대제국 고구려사

서병국, 고구려인의 삶과 정신

임승국, 한단고기

역사스페셜

www.coo2.net

-------------------------------------------------------

여기까지.


Comment ' 11

  • 작성자
    l엿l마법
    작성일
    06.05.01 23:16
    No. 1

    정말 압박이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 서정인
    작성일
    06.05.01 23:20
    No. 2

    그러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칼로쓰는글
    작성일
    06.05.01 23:25
    No. 3

    정말 좋은 글이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2 갈인
    작성일
    06.05.01 23:25
    No. 4

    압박이 심하여 밑에분에게 패스~!ㅜ,ㅠ 지성해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금기린
    작성일
    06.05.01 23:28
    No. 5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어서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혀지기를 바랄따름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LongRoad
    작성일
    06.05.01 23:42
    No. 6

    대학도서관에서 찾아보시면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고대사를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소설을 썼는지 아실수있습니다.
    단 행간의 숨은뜻을 찾아내셔야합니다. 학위딸려면 교수들 눈에 들어야 하는데 나이많은 교수분들은 대부분 일정시대에 교육받았던 분이거나 그 직계들이라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청풍야옹
    작성일
    06.05.02 00:33
    No. 7

    머.. 이 글만 보고서 이글내용을 100%로 신뢰할순 없지만..
    수당대군을 격파하기로 유명한 연개소문이 평범한 인물일수야 없겠죠?^^;;
    그리고 그사람이 위대하닥 해서 자식농사도 위대하게 지으란 법은없죠.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謙風
    작성일
    06.05.02 00:36
    No. 8

    거기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에 태클걸리면 대.부.분은 화를내거든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 saintluc..
    작성일
    06.05.02 02:04
    No. 9

    그렇죠 자기의 지식에 태클 걸리면 대부분 화를 내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 수록 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달의마법사
    작성일
    06.05.02 07:09
    No. 10

    넵..좋은글이네여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뮤트
    작성일
    06.05.02 13:11
    No. 11

    머 딴지는 아니지만 고구려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연개소문 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관점은 이런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있을때는 최고의 국가정책이지만 자신의 후대에서는 최악의 정책을 택할것이냐?
    자신이 있을때는 최악의 정책이지만 후대에는 최고의 정책을 택할것이냐? 거기에서 연개소문은 전자를 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런 평가도 나올수 없을정도로 고구려는 강자 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연개소문의 아들들에게 음모 정책을 펼쳤죠. 머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하던 그짓거리가 그들 역사의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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