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은 녹목목목을 편애하고 있었다.
아니, 유달리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일까.
녹목목목은 거리낌없이 진산에게 '사장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데, 가끔 내가 그렇게 부를라치면 진산의 눈초리는 홱 하고 치켜올라갔다.
차별을 감내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이런 생활이 일주일이나 흐르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진산에게 항의를 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점소이랑 숙수랑 같냐?"
하긴 내가 보기에도 녹목목목은 매우 유능한 종업원이었다.
각종 조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국제 소믈리에 자격도 취득한 사람이었고, 칵테일 빌드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진산의 지시에 따라 삼일에 한번씩 나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에, 현재 나의 삶 속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녹목목목은 베트남 사람이다.
그녀의 조국 베트남에도 무림이 상당히 활성화 되어있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요사이 꽤 친해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녀가 베트남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고급노동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대체 왜 이런 이상한 가게에서 돈까스 안주를 튀기고 있는지 이해가 불가능이다.
한국과는 달리 베트남에서는 무공이 실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 왔다고 한다.
그녀가 내게 전수하는 무공도 대부분 '금나수에서 파생된 접시 잘 닦는 무공'이라던가 '봉법에서 파생된 대걸레질 잘하는 무공'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베트남에선 이미 널리 퍼져있어서 아무 서점에나 들어가면 가사노동공(家事勞動功) 교본을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것들은 실전격투에는 티끌만큼도 상관이 없었고 신체적 변화라고는 그저 류마티스 예방이나 손톱무좀 방지 같은 효용이 전부라고 한다.
그녀가 전수한 수법(手法)은 모두 4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초, 숟가락 닦기는 쾌와 연환에 중점을 둔 무공으로서 하나의 숟가락을 최대한 빨리 닦아내고 다음 숟가락을 집는 동작을 간결화 함으로서 주방에서의 동선을 최단화 하는것이 일차적인 수련목표였다.
2초, 접시 닦기는 24식 태극권의 '람작미' 라는 초식을 응용한 것으로 태극권의 추수와 비슷한 수련법으로 원운동과 위치에너지를 활용하는 지극히 난해한 초식이었다...고 하고 싶지만 그저 접시를 탄탄히 잡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찌든때를 벗겨낸다는 것이 접시닦기 초식의 오의다.
3초, 냄비 닦기는 접시닦기 초식의 발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경쾌한 손놀림과 거침없는 수세미질로 커다란 냄비를 순식간에 닦아내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고
4초, 싱크대 닦기는 중과 쾌, 안의 묘리를 담고 있는 초식으로서 이 수법 전체를 관통하는 궁극의 절초라 할 수 있었다. 넓은 공간을 최소한의 몸놀림으로 최단시간안에 닦아내야 하며 절정의 경지에 이르면 수세미와 퐁퐁 하나만으로 24평짜리 대형음식점용 주방을 30분 안에 혼자 청소할 수 있다는 청소계의 구명절초였다.
그녀가 전수한 봉법 역시 지극히 고명했다.
경지에 이르러 내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지면 대걸레의 모발이 한올한올 살아 움직이며 바닥을 흝어내고 한번의 문지름으로 열번 밀어내는 이상의 효과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아직 내 성취가 미미해 아직은 아무런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요리재료 다듬는 것을 위해 검법을, 칵테일 쉐이킹을 위한 곤법을 더 배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곤 한다.
이 가게에서 생활을 하면 할 수록 녹목목목 역시 첫인상과는 달리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그녀의 이성관에서 비롯되었다.
영업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면서 그녀와 수다를 떨던 와중에 그녀가 충격적인 발언을 했던 것이다.
"와그라는데예? 내가 좌백님을 사모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소?"
어째서 외국인들은 한국에 오면 표준어보다 이런 엉터리 사투리를 먼저 습득하는 건지 알수가 없다. 하여튼 나는 경악을 숨기며 진산의 그림자라도 보이지 않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모, 좌백님을 녹슨씨가 만나보지 못해서 그라는기제. 그 아름다운 미모와 청량한 음성... 보소! 나는 베트남에서 좌백님 팬클럽 회장이어라!"
그러면서 그녀는 지갑을 꺼내어 내게 보여주었는데 그곳에는 웬 소년기의 아이돌 스타 한명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헉! 말도 안돼. 이게 중년 남자의 얼굴이야? 아니 그보다 댁은 왜 남의 배우자 사진을 맘대로 지갑에 넣고 다니는건데?
"이.. 이게 사장님 남편 사진이에요?"
"어메.. 좌백님 같은 무림의 아이돌 스타를 모르고 살았소? 생사박 좌백. 19XX년 X월 X일. 출생지 어디어디...."
그녀는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좌백의 신상명세를 주욱 읊었는데, 정말 행복한... 아니 잠깐.
"말도 안돼! 나보다 어리잖아!?"
"몰랐소?"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아들이 있는데?"
"좌백님이 조금 결혼을 일찍 하신 편이지라..."
안타깝다는 눈치였다.
게이 바, '사천당문'의 영업시간은 오후 6시부터 새벽 3시.
목 좋은 곳에 있는 건물의 2층을 임대하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며 깨닫게 된 새로운 사실은 바로 손님들이 대부분 무림인들이라는 발견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또다른 컬쳐 쇼크를 가져왔다.
"아니, 그럼 여기 오는 손님들은 모두 동성애자에 무공을 익혔단 말이에요?"
"알고 있구마이."
정말 흔히 볼수없는 특징의 조합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의외라고밖에는 할말이 없다.
나중에 알게된 것인데,
이 도시에는 동성애자만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합기도장이 있다고 한다.
회원도 동성애자, 사범도 동성애자, 관장은 자그마치 음양인이라고 했다.
음양인. 다른 말로는 양성구유. 쉽게 말해서 자웅동체.
그런 사람이 우리 가게의 단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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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ㅇ; 다시 말하지만 저는 동성애 옹호론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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