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차분합니다. 또한 불필요한 표현을 최대한 배제해가며 장면 자체가 주는 분위기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기도 합니다. 서술과 대사를 잇는 기교가 능숙해서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도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가끔씩 치고 나오는 서술자의 독백은 감각적이고 섬세해서 장면위주의 구성이 줄 수 있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합니다. 한마디로 <회색시대>는 흡인력이 있는 소설입니다.
기법적인 부분만을 놓고 본다면 인물의 과거를 회상시키는 방식이 가장 인상에 남았습니다. 진이 ‘누군가’의 과거를 설명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 부분을 보면 서술자가 과거를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눈동자의 색이 더 짙어진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부분에서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하되 말하지 않는. 알 듯 모를 듯한. 마치 베일 뒤에 가려진 무언가의 실루엣을 본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이 들었던 셈입니다. 물론 프롤로그에서 “천으로도 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회색이 있다”는 암시가 없었다면 그런 착각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지만요.
무엇보다도 휴르나 부인이 가지고 있는 그림에 대한 환상과 애착은 과연 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특정한 금기가 단순히 작품 속의 금기에 머무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작중 인물들이, 아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박탈당한 색과 조형물에 대한 꿈과 희망이 실제로는 우리가 현실 속에서 잊고 있었던 어떤 소중한 것들이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흔적들을 반추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감동’, 말 그대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셈이니까요.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여러 비극들이 그렇듯 인물 내면에 발생한 균열을 포착하고, 또 작중인물들이 그 균열을 메워가는, 때로는 더욱 벌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입니다. 실제로 진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카르가 품고 있는 이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킵니다. 카르, 진, 혜인 이 세 사람이 작품 속에서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품고 있는 상처와 균열이 그만큼 어둡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모양과 크기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만약 그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적어도 저울의 바늘은 같은 숫자를 가리킬 거라고 믿습니다.
<회색시대>의 인물들은 암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말처럼 노래를 부르는 대신 기도를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매력은 어둡고 쓸쓸한 시대적 배경에 존재합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탄압 속에서도 누군가는 꿈을 잃지 않고, 또 누군가는 꿈을 꾸려는 사람을 응원하고, 또 누군가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꿈을 꾸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소설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하나 둘 늘어갑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쉽게 손을 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의 미래는 어떤 색으로 덧칠해져 있는지, 저는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차례입니다. 함께 확인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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