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휘
작품명 : 검황 지존보
출판사 : 청어람
(같은 이름의 앞글에 댓글을 달고자 했는데, 며칠을 어름어름하다보니 high/low란으로 넘어가 버렸고, 마침 좋은 예도 있기에 같은 제목으로 새 글을 씁니다.)
"대경이 처음 객잔에서 보았던 동파육은 물론 개수백채와 이홍장잡회 등, 정말 맛깔스럽게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검황 지존보 1권 225페이지) (226페이지에는 이홍장잡회를 먹는 방법까지 나타남)
그냥 모르고 읽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문장입니다. 이홍장잡회는 요리강습에나 등장하고 개수백채는 정찬이 아니면 나오지 않지만 동파육은 단위 요리로도 팔고 있으니 굳이 먹어보려면 먹어볼 수도 있는 음식들인데, 이 요리들을 한번 구경이라도 한 사람에게는 이 설명들은 정말 황당한 내용이 됩니다.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지만 뭐 이미 알고 있는 걸 어쩌겠습니까?
일반적인 중국음식과는 거리가 멀게 시커먼 덩어리로 보이는 동파육은 '못생겨도 맛은 좋아'의 대표적인 예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정말 맛깔스럽게' 보일 수 있는지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을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러나 다음 '개수백채'는 작가가 그게 뭔지 알고 썼는지 심히 의문입니다. '開水白菜'의 '개수'는 맑은 국이라는 의미고 '백채'는 그 중국음 '빠이차이'가 우리 말 '배추'의 어원이 된 것이므로 '개수백채'는 아무 것도 올라가지 않은 그냥 '배추국'입니다. 맛이야 국빈 만찬에 올라갈지 몰라도 이게 '정말 맛깔스럽게' 보인다면 주인공 대경은 산에서 자라 나물국도 먹어본 적이 없는 거겠지요. 이 역시 일반적인 중국음식과는 거리가 멀게 극히 소박한 음식입니다.
세 번째 음식, 이홍장잡회는 '이홍장(李鴻章)'의 '잡회(雜회)'(회=火+會)입니다. '회'는 모듬전골의 의미고 '잡'은 모듬의 강조가 되므로 '이홍장잡회'는 '이홍장에서 유래한 모듬전골'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국사시간에 졸았다 하더라도 이홍장은 민비, 대원군,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계속 튀어나오는 19세기 말의 인물이므로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으로 중고 국사교육을 받았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이홍장잡회’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홍장잡회는 일본에 전권대사로 건너간 이홍장을 골탕먹이기 위해 일본인들이 중국인에게 낯선 음식을 차려놓자 이홍장이 한 냄비에 모아 넣고 끓인 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므로 안휘성(청나라 강희제 때까지 강남성) 음식이 된지 겨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유래가 맞건 안 맞건 이홍장은 19세기 말 인물이며, 20세기에 턱을 걸쳐 죽었으므로 거의 현대사의 인물입니다. 좌우간 이홍장잡회는 아무리 빨라도 19세기말 이전에는 나올 수 없는 음식입니다. ‘이홍장잡회’를 보고 '이홍장'이 연상되지 않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거지요. 이쯤 되면 휘작가가 ‘동파육’이 소동파에서 연유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어휘구사력이나 맞춤법을 보아 휘작가는 고교 이상의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보이는데, 왜 ‘이홍장잡회’를 보고 국사시간의 그 ‘이홍장’을 떠올리지 못했을까요? 혹시 요즘에는 국사가 중고 교육의 필수과목이 아니라 이홍장이 누군지 몰랐을까요? 만일 국사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랬다면 그 원인은 한자에 대한 무지에 기인할 것이고, 만일 그렇다면 그건 휘작가 본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한자교육 정책과 현실적인 한자의 위상 문제라고 봅니다.
많은 분들이 무협의 주독자층이 10대, 20대인 것으로들 생각하는 것 같은데, 국내 무협의 효시라고 할 만한 정협지가 신문에 연재된 게 60년대 초반이므로 처음으로 무협을 대한 독자는 지금 6,70대가 되었을 것이고 이분들의 상당수는 지금도 여전히 무협독자입니다. 즉 공개적으로 대본소를 드나드는 10대, 20대뿐 아니라 이들에게 책을 부탁하고 인터넷에서 훔쳐보는 독자는, 한자 교육을 받은 4,50대, 한문 교육을 받은 6,70대까지 포함됩니다. 쪽팔려서 내놓고 표현은 안 하더라도 오히려 이들이 다수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늙다리들이 봤던 무협은 구무협이고 신세대들이 보는 건 신무협인 게 아니라 구무협들을 보아온 이들이 지금 신무협도 보고 있는 거지요. (얼마 전 거의 음란 로맨스소설에 해당할 삼마이 무협을 거창하게 ‘구무협의 부활’ 어쩌구 하고 내놓은 이들은 기정(奇情)무협이 구무협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더만...)
한문세대와 한자세대, 국어전용세대의 차이가 단순히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고 안 하고의 차이일까요?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자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글자 하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영어에서 숙어와 파생어, 어원 등을 공부하듯 한자 한 글자를 배우면 그 용례, 연원, 고사성어 등 한 덩어리(packet)의 정보를 통째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 고전에 대한 한문세대와 한자세대, 국어전용세대 간의 정보량의 차이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풍습이나 고증의 문제를 일부러 들춰 따지지 않더라도 한글전용세대가 쓴 무협에서 고전에 대한 정보량의 부족은 한문/한자세대들에게는 바로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더구나 한자교육을 중단하고 한글전용을 채택하면서 원음 표기원칙 어쩌구 하면서 그나마 원래의 표기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한문세대는 ‘李鴻章’이라고 배워 ‘리훙장’ 시대를 살고 있고 한자세대는 ‘이홍장(李鴻章)’이라고 배워 ‘리훙장’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李鴻章’이라고 쓰건 ‘이홍장’이라고 쓰건 ‘리훙장’이라고 쓰건 그게 같은 짱깨를 가리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 전용세대는 국사시간에 ‘리홍장’이라고 배웠을 것이므로 뭔 재주로 ‘이홍장잡회’를 보고 ‘리훙장’을 연상할 수 있겠습니까?
더더구나 휘작가가 ‘이홍장잡회’의 자료를 찾아봤다고 하더라도 중국어를 좀 알지 않으면 뭔지 잘 모를 ‘간자“가 병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더더더구나 ’회(火+會)‘ 같은 건 웬만한 옥편에도 안 나오는 희자를 간자로 써놨는데, 이런 거 일일이 파악하려들다간 머리에 쥐날 정도일 겁니다.
더더더더구나 우리가 아는 한자는 이미 고문(古文)에나 사용되는 ‘죽은 문자’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80년대까지는 명동 중국대사관에 ‘중화민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한자는 당연히 정자를 배웠습니다. 90년대 들어 중공오랑캐였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사관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하루아침에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전락했습니다. 정자는 12억 중국인이 쓰는 ‘간체’에 밀려 겨우 2000만도 안 되는 ‘홍콩’이나 ‘대만’이나 사용하는 ‘번체’가 되었습니다. 1억 2천만이 사용하는 일본의 ‘약자’에도 눌리는 그야말로 소수민족의 소수 글자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러니 4,50대 이전에는 생활문자였던 한자가 이제는 국사나 동양사, 동양철학을 하는 이들의 전공에나 필요한 학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문교실을 몇 년 다녔다는 놈이 쓸데없는 ‘어조사 혜(兮)’는 알아도 ‘신문’을 한자로 써보라면 못 쓰고, 더 나가 중국어를 전공했다는 이가 정자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걸 실제 본 적도 있으니 이게 한자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협작가가 되려면 한문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휘작가가 ‘리훙장’만을 배웠을 것이므로 ‘이홍장잡회’에서 ‘이홍장’이 19세기 인물인 걸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변명해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는 무식은 용서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나아가 휘작가의 주변상황이 빈한하여 배추국(개수백채)이 그리 맛깔나 보이는 것도 용서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더 나아가 이홍장잡회가 19세기말에 나온 음식인지 몰랐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뭔지도 모르는 걸 아는 척 “...닭고기에 해삼을 말아 입에 넣었다.” 운운하며 사설을 늘어놓는 건 기만행위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
영국의 독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지상 최고의 조크는 ‘좆’도 모르면서 ‘쇠좆매’에 대해 썰을 푸는 것‘이라 했습니다. 도대체 왜 자기가 모르는 걸 아는 척 살을 붙여가며 사설을 늘어놓는 건지 그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 업무분야에서 가장 많은 책을 낸 이는 우리 분야의 수준을 너무 내리 깔아 쪽팔리니까 제발 책을 내는 건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 이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식당을 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음식을 할 때는 사람들이 절대 근처에도 못 오게 하는 이들입니다. 제대로 아는 이들일수록 자기 지식을 풀어놓기에 신중하며, 제 맛을 낼 수 있는 이들은 오히려 남에게 돈을 받고 음식을 내놓기를 겁냅니다.
설사 구무협 세대라도 지금 읽을 수 있는 건 신무협뿐이니 한자를 모르건 시대적 고증이 틀리건 세대의 차이로 보아 다 용서들 할 겁니다. 그러나 워낙 중국 고전에 대한 정보량의 차이가 커서 신무협 작가가 아는 척 해봤자 조사하면 다 나오니 제발 객쩍은 소리 좀 늘어놓지 말고 두루뭉실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큰 스트레스 없이 200페이지까지 잘 넘어 왔기에 그냥 ‘개수백채’, ‘이홍장잡회‘만 열거하고 넘어갔어도 용서할 수 있는데 왜 ‘이홍장’도 모르면서 ‘이홍장잡회’에 대해 잘난 척 썰을 풀어 스트레스를 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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