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좌백
작품명 : 비적유성탄
출판사 :
한 편의 시와도 같아
가슴을 진하게 울려오는군요
몇 년 전 읽고 북받치는 느낌에
개인 블로그에 올려두었지요.
가슴을 무딘 칼로 베어내는 느낌...
가족을 보내본 사람이면 느끼실
그 막막함과 어쩔 수 없는 황량함...
그 메일 듯한 느낌..
시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문단을 자르다 보니
본래의 느낌을 훼손한 감이 있어 죄송스럽습니다...
구무협과 신무협의 연결고리로서
위대한 한 획을 그으신 좌백님의 책을
일독하시기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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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제비가 낮게 날더니
황혼이 질 무렵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흘 전부터 태워온 장작더미는
비가 내리기 전에 이미 꺼져서 연기만 피어올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그 연기마저 걷어주었다.
그는 새하얗게 타버린 잿더미를 뒤져서
몇 조각의 골편을 골라냈다.
삼년간 같이 살아온 아내이자 친구,
그의 또 다른 한쪽이 되었던 여인의 마지막 잔해였다.
그녀의 이름은 제비라는 뜻의 연(燕)자를 썼다.
이름처럼 제비같이 날래고, 웃음이 많은,
나이가 들어서도 소녀처럼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여인이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다 죽기 직전에는
진짜 제비 한 마리만큼의 무게로 시들어가면서도 농담을 했다.
“새……
새 장가 가면…….”
그는 작은 해골처럼 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에 귀를 가져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자기가 죽으면 새 장가를 가서 대를 이으라는 것인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녀가 말했다.
“원망할 거야.”
연은, 제비는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 표정 그대로, 마지막 웃음을 그에게 보여주고 그녀는 죽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제비와 함께 살아온 지난 사 년 간은
끊임없는 죽음의 연습과도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어떤 약도, 어떤 기도도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죽음이었다.
아홉 명을 죽이고, 한 명을 백치로 만들며 번 돈으로
그는 약을 사고,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살인을 해서 번 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는 차라리 한숨을 돌린 듯한 기분이 되어
시체 옆에 앉아 있다가 준비해둔 수의를 입히고,
준비해둔 장작에 얹어 불을 질렀다.
탈 것도 많지 않겠지만 사흘 동안 불을 지폈다.
남기는 것 없이 깨끗이 수습해서 떠나도록
그렇게 오랫동안 태웠다.
그래도 남은 뼈 몇 조각,
미련처럼 남은 회색 뼈 몇 조각을 그는 항아리에 담았다.
그리고 그걸 앞에 두고 술을 마셨다.
가을의 차가운 비가 머리를, 어깨를 두들겼다.
몇 년간 그는 제비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물론 그러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긴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그건 행복한 괴로움이었다.
내키지 않는 살인도 해야했지만,
그녀의 목숨은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의 목숨을 합친 것만큼 귀중했다.
게다가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은 무림인이고,
무림인이란 목숨을 담보로 부와 명예를 얻는 자들이 아닌가.
마지막 중은 아닌 것 같아서 겨냥이 흔들려버렸지만.
그는 그가 죽인 자들과, 죽이지 못한 자에 대해서,
자신이 비적 유성탄이란 이름으로 한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다.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공을 들인 것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십대라는 중요한 시절에 사년이라는 세월을 바친 모든 것이
지금 한 줌의 재로 스러져 버렸음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허탈할 뿐이었다.
그는 평상처럼 넓적한 바위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비가 얼굴을 때렸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하고싶은 일도, 해야할 일도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의 삶과 생각은
전적으로 제비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갑자기 삶과 시간을 돌려받은 지금 그의 기분은
오솔길을 벗어나 길 없는 광야에 나선 것과 비슷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가고싶은 곳도, 가야할 곳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하고싶은 일도, 해야할 일도 없었다.
그는 팔을 괴고 누워 술잔에 술을 따랐다.
빗물이 술과 함께 잔을 채웠다.
술잔 속에는 끊임없이 빗방울이 떨어져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오랜 시간 그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술잔도, 술병도, 뼛조각을 담은 항아리도 빗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그는 문득 항아리를 당겨 빗물 속에 잠긴 뼛조각을 꺼내었다.
뼛조각은 돌처럼 단단했지만 그의 손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뼛조각을 양손바닥으로 비벼 으스러뜨리고
그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다.
빗물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를 마셔
남은 가루를 뱃속으로 흘려보냈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남겨진 뼛조각은, 제비, 그의 아내이자 친구,
그의 또 다른 한쪽이 되었던 여인은
그의 뱃속에, 가슴 속에 묻혔다.
새벽이 되었다.
비는 그치고 싸늘한 가을 아침이 밝아왔다.
어디선가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물웅덩이를 스치고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름을 담아 보내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날갯짓이었다.
그걸 보며 그는 비로소 눈물을 떨구었다.
하늘처럼 무거운 죽음의 무게에 눌리면서도
제비는 저 날갯짓처럼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떠나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는 길을 떠났다.
한 사람을 잊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이럴 때 평생이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 좌백, 비적유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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