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허담
작품명 : 신기루
출판사 : 청어람
강호엔 오랜 전설 신기루가 있다. 열쇠인 천문시를 얻으면 신기루에 들어가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
신기루에 들어서기 위한 열쇠 천문시를 둘러싸고 계속되온 피의 쟁탈전. 이에 휘말려 실종된 귀곡의 곡주에 대한 단서를 찾아 귀곡의 제자들이 다시 뭉쳤다. 그중 막내제자의 아들로 촌마을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고아처럼 자란 송문악은 12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강호무림의 비사에 빠져들게 되는데...
수많은 강호 무림인들이 죽이고 문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혀왔던 신기루의 전설. 과연 신기루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정체불명의 집단이 만든 거짓인가?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음모를 파헤쳐 나가는 스토리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며 써나간 소설.
오랫만에 등장한 수준 높은 작품이었고 자신만의 색채와 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다 만나면 버릇없는 화산의 문인이요 길거리에 쭈구려 앉아 있는 저 노인은 개방의 장로고, 길을 막는 저 친구는 복면을 쓰고 어둠의 기운 풀풀 풍기는게 마교의 고수.
중원 천지가 넓다지만 걸어가다 밟히는 게 구파일방의 제자들이었고, 막강한 주인공의 힘에 한없이 체면 박살나던 그들.
명문의 후예들이면 그만한 공부를 쌓았을 터인데 정처없이 떠도는 수많은 이들이 그들보다 쎈 일이 부지기수.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강호 무림이 좁아보였습니다.
길 가다 주인공에게 채이는 이들인지라 그들만 나타나면, "아, 너희들로말할까 싶으면 내년 이맘때 즈음에 제사상을 차려 먹게 될 구파일방 녀석들이구나"라고 눈물을 머금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이 바닥이 원래 좁지."라고 말하는 듯한 수많은 명문정파 무림인들의 격랑 속에 허우적대었으나 소설 신기루를 읽고 무림은 넓다는 것을 오랫만에 느꼈습니다.
신기루에선 구파일방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구파일방의 사람들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 평생 가도 얼굴 한 번 못 보는 일도 있다네.
그만큼 소설의 속이 깊어졌습니다.
근래 주인공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홀로 독보적이었고, 어릴 적 어딘가 숨어서 죽어라 수련을 마치고 하늘에서 뚝하니 떨어진 듯 강호무림에 나타나 "Surprise! 세상아 이제 나의 위세에 놀라봐라."라며 한바탕 뒤집어 놓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보니 "구파일방의 위세에 못 미치는 한 방파의 중견고수" 그리고 "그의 아들"이 이끌어나가는 이야기를 보게되니 흥취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강호는 넓고 세상엔 명문의 벽이 있으며 '고수'란 드물다."라고 주장하는 듯 했습니다. 고수는 정말 고수였습니다. 항상 초고수, 특급고수와 함께 나타나 처절하게 밟히길 반복했던 고수는 이 소설에 없습니다. 이 소설에선 고수는 강하기 때문에 고수로 불립니다.
3권을 다 읽은 지금도 구파일방은 마치 거대한 베일에 쌓인 듯 아직 그 본 모습을 드러내질 않습니다. 집 밖에 나온 녀석들을 빼놓고는 마치 장막 속에 가려놓은 듯 하지요.
그래서인지 간간히 강호에 출두한 명문의 제자들이란 녀석들은 존재감을 풀풀 풍겨냅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어선지 세상이 대단히 넓어보입니다. 밸런스를 대단히 잘 맞추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소설 앞부분을 덥썩 물어서 놓지 않지만 그것은 사족이 아니라 작품 속 세계와 소설의 큰 틀을 이루는 거대한 "비밀"과 "음모"를 형상화시키고 주인공의 앞으로 끌어 내리기 위한 엄청나게 탄탄한 사전작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아버지 신분이 구파일방의 위세를 넘볼 순 없지만 적어도 무시당할 정도론 약하지 않은 귀곡의 여섯사형제 중 막내사제라는 설정은 대단히 현실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피부에 와 닿는 비정한 강호무림의 리얼리티를 느끼게 해주는 듯 했다고 할까요? 목숨을 초개와 같이 세상에 버리려 하지 않는 이상 절대 막무가내로 나댈 수가 없는 그런 신분이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조마조마하며 그의 땀냄새를 맡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의천도룡기의 향기가 약간 났습니다.
의문과 음모. 소설 시작부터 등장하는 거대한 음모가 점차 베일을 벗고 소설의 끝까지 영향을 미치는 꽉 짜인 플롯.
그 자체로 부자 이대의 역사를 꾸미려는 듯, 더없이 매력적인 부모를 통해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그리고 한껏 고조시킨 분위기를 고스란히 주인공에게 몰아주는 박수받을 연결성.
성격 급한 사람은 절대 느낄 수 없는 재미가 소설책에 아주 꾹꾹 눌러담은 것처럼 가득합니다.
오랫만에 포식했습니다.
평소 취향 탓에 군것질을 많이 하다가 오랫만에 어머니가 차려주신 푸짐한 밥상을 마주한 것같은 기분입니다.
P.S. 단지 문제는... 음모의 크기 만큼 강해져야 하는 주인공의 숙명 때문에 점차 사그라드는 듯한 리얼리티! 점차 반찬이 줄어간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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