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고독자이지만, 무협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한 오년뿐이 안되었다. 내가 무협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진산작가 덕분이고, 지금 그녀는 좌백작가의 사모님이 되어 소설뿐 아니라 칼럼도 쓰고 에세이도 쓰고, 만화대본도 쓰는등 대중문화 전반에 아주 박학다식한 재능을 선보이고 있는데, 그 얘긴 다음에 하도록 하고 오늘은 고무림 신춘문예 금상 수상작인 보표무적에 대한 감상을 적어볼까한다.
좌백이나 이재일같은 작가는 늘 칭찬하는 말이 끊이지 않는 작가들이다. 독자들중에는 설봉,장경,임준욱,송진용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밖에도 무수한 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책이 전부 재밌지는 않지만, 일단 이 사람들은 프로작가로써 어느정도 경지에 올라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하는 ‘보표무적’의 작가 장영훈은 조금도 알려져 있지 않고, 신예이다. 나보고 작가에 대해 물으신다면 나도 잘...모른다.
신춘문예의 수작들 중에서 보표무적은 보보노노와 위령촉루와 함께 우수한 작품으로 뽑힌 소설이니까 작품의 우수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은 왜 우수한가? 왜 재밌을까? 왜 금상에 뽑혔을까 하는 것을 한번 탐색해보자.
보표무적은 좀 독특한 소설이다. 일단 문체가 평이하고 스토리가 복잡하지 않다. 현실을 패러디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협소설의 테두리속에 잘 용해되어 있고, 무협의 기본인 무공이나 협기에 대한 묘사나 서술도 제한되어 있다. 한마디로 현대인이 상상속에서 가정한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 형 소설이랄까. 현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아주 쉽게 일어나고, 무림의 권력투쟁이 중요한 소재가 된다는 점에서 아주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떤 독자들은 상기와 같은 점을 보표무적의 약점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재미없게 느끼는 분도 있을지 모른다. 사실 이 소설에는 뭔가가 빠져있다. 나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무협소설에서 전형(典型)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이 소설은 그런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영화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영화배우 류승범의 형인 류승완이 감독한 ‘죽거나 나쁘거나’하는 영화가 있다. 이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쌈질만 하다 끝난다. 액션은 후련하지만 그것밖에 없다. 비장미가 흐르지만 어딘가 어설프다. 평론가들이 이 작은 영화에 호평을 보낸 이유는 이 영화가 기존 영화의 전통적인 틀에서 구속받지 않은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표무적을 보면서 가끔 그 영화생각을 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과거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담담히 써내려간 글이다. 그 자유로움이 아마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었나 보다.
그럼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인간애’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책안에서는 잔잔한 휴머니티가 끊임없이 흐른다. 주인공 우이는 말할 것도 없고, 무서운 노인 담백, 이노인, 흑오와 종대의 사연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없고, 알고보면 나쁜놈 없다더니 이들이 그렇다. 악인이 회개하고 담백이 인간성을 되찾는 에피소드가 얼마나 훈훈한지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릴 정도였다. 객잔의 주인장 영춘은 말할 것도 없이 휴머니틱한 캐릭터 그 자체이고.
주인공 우이는 비적 유성탄 왕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 사람도 조금 쿨하다. 왕필과 다른점은 가슴속에 뜨거움이 남아있고, 러브에 대해서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매력적이다. 객잔의 점소이로 일하지만 사실은 ‘천하제일’일지도 모를 무공의 소유자이며, 착하고, 의리있고, 겸손하고..등등 장점多 단점少인 멋진 캐릭터, 충분히 대리만족 줄만한 주인공이다. 나이도 서른남짓, 아주 적당하다.
소설속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주인공들은 어느새 그룹을 이루어 주조연 할 것 없이 인간성의 완성을 위해서 단체행동한다. 그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극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이 단순한 플롯이 이 소설의 힘이다.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어쩌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우리가 유년시절 읽었던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중에 이런 소설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줄거리도 생각나지 않지만 아주 소박하고 사랑이 넘치던 이야기들.
성장하면서 마음의 때가 묻으면서 기억속에서도 희미해져 가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소설들은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우리 마음은 아직도 꿈과 낭만과 우정과 사랑. 이런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작가는 소신껏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런 것들을 글로 형상화 하였다.
무협소설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껏 자기만의 낭만에 빠져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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