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김태현
작품명 : 화산검신
출판사 : 파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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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요즘은 그 뜻을 알 것도 같다. 나이가 그 정도 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굴에 표가 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주 특별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의 일상은 사실 몇 안되는 종류의 반복되는 사건들로 구성된다. 늘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고, 늘 걷던 모양새로 매일 걷고, 늘 먹던 음식을 먹으며 산다. 얼굴 표정도 늘상 짓던 표정을 주로 짓는다. 눈웃음 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은 나이가 장년이 되는 즈음에는 유달리 눈가 주위의 주름이 깊어 보이게 마련이고, 쉴 새없이 떠들어대기를 수 십년간 반복해온 사람은 자주 쓰던 입 주위 근육이 발달되어 입을 놀리는 모양이 기름 칠한 듯 매끄럽다. 이런 이유로, 그 습관이 새로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고 아직 특징이 외모에 굳어 박히기 전인 젊은이들은 몰라도, 나이 든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주로 짓고 살았는지, 호통을 치며 살아왔는지 너털웃음을 자주 터뜨리며 살았는지는 얼굴만 봐도 대략은 표가 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이 든 사람들 중 항시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 차 있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굳어 옹졸하고 고집스럽게 보이는 사람들은 그 지나온 인생이 울화와 짜증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는지 한 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얼굴 뿐인가? 눈빛이나 입가의 주름 외에도 걸음걸이, 말투, 입고 있는 옷에 구김이 얼마나 가있는지 등등 평소 하고 다니는 모양을 보면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성정이 털털한지 까탈스러운지 정도는 짐작이 된다. 운동선수는 근육을 통해 어디를 얼마나 인내하고 노력했는지 드러나고, 학자라면 그 글 속의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서 그 각고의 노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어떻게 하고 살아왔는지는 외적인 모양새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는데 아주 드물게 그 기풍이 대단하여 감탄을 마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간혹 있다. 흔히 유명한 위인들의 전기에서 이미 그 기도가 남다름을 보여주는 예화들을 접한 바 있고, 실제 살면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도 그 기운이 강렬하여 눈을 떼지 못한 경우가 두 번 있다. 믿기 어려울 만큼 보통의 사람들과는 느껴지는 존재감 자체가 달랐는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아보니, 둘 모두 자신을 이겨내는 습관을 들여 수 십년간 날마다 몸소 실천해오신 분들이다.
사람은 본래 타고난 모양(品)과 그 격(格)이 제각각 다르지만 역시 그 중 으뜸은 극기를 바탕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이 습관으로 몸에 배어 그 따뜻한 마음이 겉으로도 드러날 지경이라, 감히 가벼이 대할 수 없지만 또 같이 있으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한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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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화산검신의 주인공 연과가 이러한 으뜸가는 유형의 사람이다. 삼대제자 중 맏이이면서도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교실 격인 매지관을 정리하고, 날마다 돌아가신 사부의 거처를 청소한 뒤, 사부에게 향을 올린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부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우직하게 하루하루 오지검을 수련하는 모습에서 그 살아가는 태도가 참 높고 바르다는 것을 알았다. 수 년간 날마다 향을 올리고 검을 수련하며 죽은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노력을 통해 쌓아올린 품의 넉넉함이 보통의 사람과 같은 수준이라 생각할 수 없다. 생전 사부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그 의미를 곱씹고 와중에 자신의 언행 역시 돌이켜보게 되며 아쉬웠던 부분을 바르게 고쳐 보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하루 이틀이면 모르지만, 한 달 일 년 십 년이 다 가도록 자신을 갈고 닦는 일을 지속했을 때, 우리가 그의 말 한마디와 눈빛, 표정, 차림새, 걸음걸이 등에서 남다른 면모를 느끼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수 년간 생활하다보니 연과는 어린 나이에도 그 기도가 과연 범상치 않아 알아볼 눈이 없는 어린 사제들도 몇 년 째 기초검공인 오지검에 머무르고 있는 연과에게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고, 연과 역시 알게 모르게 사제들을 뒤에서 돌본다. 모든 세세한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문파의 어른들도 문규를 어긴 연과에게 죄를 묻지만 동시에 그가 화산 제자임을 잊지 않고 천박하게 괄시하지 않으니 이쯤 되면 확실히 도문道門 다운 도문을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엄격하나 잔인하지 않은 장문인과 승부욕이 강하지만 질시에 함몰되지 않는 사제 진가위, 오만했지만 잘못을 깨우쳐주었을 때 반성하고 고칠 줄 아는 공손조량, 그 외에도 매력 있는 인물들이 가득한 가운데 그 중심에 주인공 연과가 있고, 그 높은 품과 격에 걸맞는 선대의 유지를 이어 자하심결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성해 가는 모습이 대단히 흥미롭다.
간만에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준 작품이다. 재미있었고,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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