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박지훈
작품명 : 여신창립학원 엘스라드
출판사 : 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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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님, 문 열어주세요!"
검술의 천재이자 마법의 귀재,
타고난 지도자, 또한 천하의 백치!
패망한 왕국의 왕자 르윈 루마드리프가
엘스라드를 침공한다!
그렇기에 지금, 여신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차기 지도자들을 입학시키세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뒷일은 책임지지 않겠어요.
―언제나 여러분을 사랑하는 여신, 엘스라디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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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스토리같은 글」이다. 이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무나 적절해서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삽화를 담당하신 유현님께서 만화를 그렸다면 재미나게 읽었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쪽은 나의 만화적 상상구현 스킬 부족이라는 문제로 인해 약간 애로사항이 있었다.
만화와 소설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보여주는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만화는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그 외 부분은 상상력으로 채워넣는다. 소설은 그 반대다. 작가의 서술을 통해 다양한 측면의 정보를 획득하고, 비쥬얼적인 부분은 머리 속에서 해결한다. 이런 차이가 소위 만화적 표현이니 소설적 기법이니 하는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여신창립학원 엘스라드』는 시각적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분량의 태반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과장된 상황 묘사로 채워져 있다. 화가 난 악마소년은 신의 비서인 '공'을 발로 뻥 차고 그 공은 온 방안을 격렬하게 튀어 다닌다. 수줍음 많지만 힘은 센 요정은 마치 충차의 돌격과 같은 맹공을 친구 옆구리로 찔러넣어서 그를 날려버리고, 사방신의 일인인 청룡은 어디선가 10톤이라 쓰여진 거대솜망치를 꺼내들고 헛소리하는 계약자를 후려친다.
기타 등등 이런 장면들이 만화로 그려져 있다면, 독자는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는다. 만화니까. 시각적 자극에 강하게 의존하는 만화에서 그런 식의 과장된 표현은 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아무도 시티헌터에서 여주인공이 꺼내드는 몇 톤 짜리 망치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망치에 맞아서 날아간 남주인공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만화니까"
엘스라드는 그런 만화적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머리 속에서 상황을 떠올리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르시나가 처음 신의 비서 '공'과 만나는 장면. 그녀는 멋대로 공이라 이름지어버리고, 말로 밀어붙이고, 분위기로 압도해버린다. 공은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이르시나에게 밀린다.
만화로 그려져 있으면 전혀 문제 없는 장면 구성이다. '마이페이스의 포스를 사방으로 뿌리는 차가운 성정의 미소녀'가 '둥둥 떠다니며 주절거리는 구형의 괴상한 물체'를 보고 행할 만한 모습이다. 만화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대화와 묘사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소설'에서는 문제가 있다는 거다. 이 장면을 납득하고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서 그 상황을 떠올려서 만화 보듯이 읽어야 한다. 단순히 글만 읽어서는 '제가 지금 뭘 읽고 있는거죠?' 라는 느낌.
다른 이들에겐 어떨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경우, '소설 엘스라드'라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머리 속에서는 '만화 엘스라드'를 계속 그려야만 했다. 그래야 작가가 의도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고, 보여주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이 과정에서 유현님의 일러스트가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여타 소설처럼 그저 읽으면서 머리 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머리 속에 상황을 구성하고 만화 한편 그려내야 글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만화였다면 작가가 시각적으로 제시해줄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피곤한 과정이었다. 처음에 썼다시피 나는 만화적 상상력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다.
일단 1권은 완벽하게 서론이다. 캐릭터들이 모이고,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 대충 끝났다. 솔직히 2권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전혀 모르겠다. 첫 번째 권만 봐서는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에 중점을 둔 소설이다.
조심스레 예측해보건데,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는다면 아마 이후부터는 각 캐릭터의 과거 이야기라던가 숨겨진 사정, 아픈 추억 등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씩 나오고 F클래스의 친구들이 절대무적 우정파워로 차례로 클리어(?)해 나가는 식의 구성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중간중간 유쾌하고 골때리는 에피소드를 넣어가며.
사실, 인간관계의 묘사에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했다.(인간은 얼마 없지만) 같은 클래스가 된 후, 대화 몇마디 하고 약간 티격태격 하더니 순식간에 친해지고, 친구라 인정하더니, 서로를 위해준다. 그 구성원이 천사, 악마, 용, 요정, 정령, 인간인데도.
아무리 그 종족들 중에서도 특출난 애들이라지만 각자 살아온 환경 차이가 있고, 종족 차이가 있고,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 터인데 그런 쪽의 깊이 있는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뭐 작품 분위기상 심각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는 것 알지만 그래도 너무 간소하다는 느낌.
제일 좋았던 부분은 유현님의 일러스트. 원래 좋아하는 분이기도 하고('선녀강림'의 작가분이다), 작품 분위기에 딱 맞는 그림체인 것 같다. 내부일러스트 구성도 내용과 잘 어울리고. 유현님의 삽화를 바탕으로 머리 속에서 계속 그림그리면서 읽었기 때문인지, 소설이 아니라 만화책 몇권을 읽은 듯한 기분이다. 소설보다는 만화로 만났으면 더욱 좋아했을 작품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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