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선생님의 작품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내가 보지 못한, 내가 소장하지 못한 그의 작품을 찾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도 자주 가던 동대문의 총판에 들렀다. 곤룡유기 7권을 사기 위해서였다. 가게안에서 나는 평소엔 눈길조차 가지 않던 옛날 책들을 쌓아 두는 곳에서 낯익은 세글자를 발견할수 있었다.
연성결
흡! 순식간에 숨이 막혔다. 상하 두권으로 완결된 그 책은 분명 김용의 연성결이었다. 토끼를 잡으러 왔다가 덫에 걸린 사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황급히 주인에게 물었다.
"연성결 얼마에요?"
"아아, 저거 권당 1500원..."
책값이 터무니 없이 싸다는 것은 나에게는 기쁨과 서글픔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주머니에 여분의 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기뻤고, 신필 김용의 책 한권의 값어치가 고작 1500원 이라는 사실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굉장히 오래된 책인것 같아서 발행년도를 보았다.
1989년
지금부터 정확히 14년 전에 나온 책이었다. 확실히 요즘 나오는 책들과는 그 질부터 많은 차이가 났다. 하도 예전에 나온 책이라 거칠게 다루면 잘 부숴질까 두려워 고이고이 신주단지 모시듯 모셨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무협을 보았고, 그 많은 수의 무협속에는 가지각색의 무협이 녹아내려 있었지만, 연성결은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자 폭풍의 핵이 되었다.
신조협려와 함께 양대 애정소설로 불리우지만, 실제로 신조협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신조협려가 정(情)을 주제로 삼은 소설이라면 연성결은 윤리와 도덕, 규범의 파괴를 주제로 다룬 소설 이라고 하겠다. 신조협려가 세상 모든 종류의 애정을 다뤘다면, 연성결은 세상 모든 죄악을 낯낯이 파헤쳐버린, 소설이다.
1.사부가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칠 때 일부러 무공의 구결(口訣)을 틀리게 가르친다.
2.여인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며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보낸다.
3.사형제(師兄第)간에 탐욕에 빠져 서로를 죽이려고 한다.
4.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딸을 산채로 관(棺)속에 넣어 죽인다.
5.자신의 사위가 될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끊임없이 고문(拷問)한다.
연성결 속에는 가지각색의 악행(惡行)이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극악무도한 죄악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게 하는 원인은 보물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보물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죄악도 망설임없이 저지르게 하느 것이다.
또 연성결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말못할 고통(苦痛)을 감당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주인공인 적운이 그렇다.
적운은 자신의 사매이자 정혼녀인 척방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힌다. 자신의 사형뻘인 만규가 척방의 미색을 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비파골에 쇠사슬일 뚫린채로 무려 5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감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뒤에는 더욱더 비참하다. 서장승에게 잡힐까 두려워 몸을 숨기고, 남이 못알아 보게 하려고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한올한올씩 뽑는다.
걸핏하면 오해를 받아 선행을 하고도 목숨을 위협받는다.
또한 연성결은 다른무협에서는 볼수 없었던 독특한 장면을 묘사한다.
바로 인간이 죽음에 직면했을때 얼마나 비굴해 질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무협소설에서 묘사된 협사(俠士)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면에서는 당연하게 여긴다. 스스로를 칼밥을 먹고 살고, 칼위에 노니니, 칼에 죽는 것은 자연스런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용은 이러한 무협의 틀을 포테이토 칩 부수듯이 과감하게 깨뜨린다.
강호에서 능히 열손가락 안에 드는 대협중의 대협, 남사기 중의 일원인 화철간은 자신이 죽을 것 같자 적에게 아부하고 빌붙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발버둥 친다. 자신에게 호의를 배푼 주인공을 다른사람들에게는 천하의 음적이라고 매도하며 자신의 악행은 교묘히 은폐하기에 이르른다.
실로 김용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속속들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묘사에는 김용의 훌륭한 필력도 한몫을 했다.
비록 두권의 짧은 무협소설이지만, 연성결은 '인간' 으로서 할수 있는 행동과 심리 상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김용은 이 소설에서 무와 협을 주제로 하기보다는 '인간' 과 '윤리' 그리고 '악' 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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