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손해 보면 또 어떤가? | 2004.05.25 09:45:18
by 하얀검댕이
현역시절 내 주특기는 104다. 청운의 꿈을 안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해서 나름대로 편한 주특기를 기대했던 내게 돌아왔던 것이 M60 기관총을 다루는 104주특기였다. 자대에서도 제대할 때까지 오로지 기관총만을 벗삼아 군생활을 했었고. 소위 말하는 꼬인 군번, 꼬인 주특기다.
말이 104고, 말이 M60 기관총이라니까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104 주특기를 가졌던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저주였다는 것을. 그렇다. 이건 저주였다. 저주도 아주 극악한 차마 상상하기조차 싫은 저주였다.
생각해보라 30킬로그램짜리 군장 위에 11킬로그램짜리 M60기관총을 얹고 일주일에 한 번 20킬로미터 행군을 해야한다는 것을. 산넘고, 물건너, 계곡을 타고, 도로를 거스르며, 철컹거리는 M60의 무게가 어깨를 짖누르는 가운데 80킬로미터 행군을 하는 것을.
100 알보병들은 군장에 그냥 4킬로그램짜리 K-2만을 어깨에 메고 가면 된다. 105 박격포는 포 무게가 무겁다고 군장을 추진시킨다. 하지만 M60은 아니다. M60은 박격포다 조금 가볍다는 이유로 군장에 기관총까지 짊어지고 가야한다.
더구나 꼬여도 더럽게 꼬였는지 이등병 때 주야장창 M60을 들고다녔는데, 병장 되니까 사수가 총 들고다녀야 된다는 규정이 생겨서 병장이 되어서도 M60 들고다녀야 했다. 말년에, 제대를 일주일 앞두고 치른 훈련에서 밤새도록 6시간동안 비내리는 산속을 M60을 들고 행군해야 하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 내 눈에 보인 알보병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만고들이었다. 분명 알보병들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겠지만, 초소한 11킬로그램짜리 M60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물며 행정병은 어떠할까? 훈련 때마다 밥차 왔다갔다하는 뽀얀 살집의 보급계를 보는 감정은 어떠했을까?
누구는 힘들지 않은 군생활을 했겠느냐만, M60은 M60나름의 피눈물나는 어려운 군생활을 해야 했었다. 인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M60 보직이었던 사람들이라면 내 말을 상당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 힘드니까 모든 육군병사들은 M60 들고다녀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M60의 전술적 가치를 생각해보면 그건 무리니까 대신 개인화기의 무게를 M60을 기준으로 맞추어야 한다고 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행정병들도 군장에 M60들고 훈련기간동안 연병장 뺑뺑이라도 돌라고 한다면 나를 두고 뭐라고 할까? 아마 또라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니까.
어차피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편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힘들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힘들면 그 한 켠에 상대적으로 편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불평등이야말로 이 사회를 구성하는 큰 틀이다. 그 불평등 속에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하며, 보완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원칙일 것이다.
대체복무도 마찬가지다. 대체복무의 현역입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덜하다 하더라도 그런 불평등의 한 요소로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힘든 다른 쪽에 나와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보다 편한 보직의 병역이행자가 있다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 행정병을 보면서 너희들 졸라 편하겠다고 툴툴거리는 것처럼 한 번 궁시렁거리고 인정해주면 되지 않을까?
더구나 대체복무가 모두 편한 것은 아니다. 의무소방대원은 차라리 행정병보다 더 힘들고 고될 수 있다. 전방 GOP근무보다 소록도와 같은 오지의 자원봉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더 꺼려질 수 있다. 유럽 어느 나라처럼 해외 민간지원 사업에 이들 대체복무 요원들을 투입하기라도 한다면 현역보다 더 위험하기조차 하다. 단지 현역이 아니라는 것 뿐 그렇게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대체복무는 대체로 현역입영에 비해 복무기간이 길다. UN도 현역복무기간의 1.5배의 기간까지는 허용하고 있다. 1.5배... 말이 1.5배다. 26개월도 끔찍한데 39개월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출퇴근이 가능하더라도, 아무리 그 일이 편하더라도 39개월이라는 시간을 대체복무라는 틀 안에 갇혀있는 것이 그저 좋기만 할까? 단지 다른 임무를 수행할 뿐 같은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여겨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편하기만 한 것일까?
혹자는 전쟁이 날 경우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것은 전투병력만이 아니다. 현대전은 과거와 같이 군인들만 전쟁을 수행하는 제한전이 아니다. 국가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이다. 따라서 민간인들 또한 전쟁 수행에 있어 중요한 자원이 된다.
총력전의 특징은 전방만큼이나 후방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인력과 물자를 보급해주는 중요한 보급창이면서, 전방의 병력이 휴식하거나 재보급을 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후방이 있음으로서 전방의 전투병력들은 최상의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투병력도 후방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력은 징발과 배급 등의 행정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행정인력과 유사시 불이 나거나 폭격을 당했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소방요원, 그리고 소요나 폭동, 범죄등을 예방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인력들의 민간인들이다.
이들 민간인은 전투를 직접 수행하지는 않는다. 총을 들고 싸우지도 않는다. 다만 민간인을 대상으로, 전시에도 평시와 같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임무를 맡아 수행할 뿐이다. 전방의 전투부대가 지켜야 할 후방의 민간인들의 삶을 살피고 배려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후방이 안정될 수 있어야 전방의 전투부대가 안심하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 후방의 산업과 민간시설, 행정인프라가 건재해야 전방의 전투부대도 보다 효율적으로 안정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 직접 전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또한 전쟁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총을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총력전 상황 하에서 총을 들지 않은 그들 또한 다른 형태로 전투부대와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민간인의 형태로 활용할 여지가 있는 이상 굳이 그들에게 전투부대로서의 임무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 군인이기를 강제할 이유도 없다.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민간인으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총을 들지 않더라도 그들을 활용할 방안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대체복무가 또다른 형태의 병역이라 하는 것은 그때문이다.
군인들은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지키는 사람이다. 전투병력은 전투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위험한 전투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행정병력은 전투병력이 싸우는 동안 그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후방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소방인력, 경찰보조인력 등은 불의의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사건, 사고와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사회이고 국가다. 이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동원되어서, 각자의 임무에 충실함으로써 국가의 전투수행능력을 제고하는 것이 현대전의 개념으로서의 총력전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양심적 현역입영자는 이런 커다란 틀 안에 공존하는 동반자요, 협력자들인 것이다.
그렇게 인정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조금 더 그들에게 관대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나 자신의 손해를 웃으며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꼭 그들이 나와 같은 병역을 이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한 걸음 물러서서 나와는 다른, 하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그들에게 관용을 가져보자. 그래야 할 것 같다.
출처-http://www.mediamo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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