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디로 회귀했든 어느 때로 회귀했든 상관 없습니다. 무조건 사람들로부터 도망칩니다. 근처에 숲이 있다면 숲 속으로, 늪이 있다면 늪 속으로, 사막이 있다면 사막 속으로 도망칩니다. 사막이나 늪으로 도망치면 죽을 것 같다고요? 더럽게 운 좋은 먼치킨 주인공이 아닌이상 제가 장담컨대 안 도망치시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못 한채 어이없이 골로 갈 수 있습니다.
중세 농민들은 이미 200년전에 모두 죽었으니 실제로 만나본 사람은 없지만, 문학작품및 역사기록과 중남미의 폐쇄적인 원주민 농촌들을 연구한 인류학자들의 결과에 의하면, 중세 농민들이 어떤 행동패턴을 가졌을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세 농민들은 장원 안에서 매우 폐쇄적인 조직을 이룬 상태로 외부에서 온 것이라면 무작정 병균이라 생각할 정도로 질색할 것입니다. 만약 그 중세 농민들이 중동지역에 위치해있다면, 이슬람 농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당신을 카톨릭 여행자라 믿을 것이며 카톨릭 농민들은 당신을 이슬람 여행자라 믿을 것입니다. 만약 그 중세 농민들이 유럽 본토에 위치해 있다면 당신을 극도로 적대시하다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놀라며 린치를 가해 죽이거나 묶어서 노예로 팔아버릴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요? 외딴 곳에 있고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중남미 원주민 농촌에 이상한 복장 입고 한국어만 말하면서 들어가 보세요. 당신은 순식간에 그들의 원수가 되거나 재산이 되거나 둘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중 그 누구의 혈족도 아니기에 혈족의 보호도 받을 수 없고 마을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마을의 일원도 아니며 기이한 언어와 풍습을 가졌기에 그들의 민족도 아닙니다.
2. 도망친 후에는 도망친 곳에서 채집과 수렵을 이용해 먹고사는 법을 배웁니다. 못 배우면 굶어 죽거나 숲을 지나다니는 용병 무리에게 잡혀 노예로 팔리거나 맹수에게 덮쳐져 죽습니다. 배울 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한대, 못 배우면 죽으니 딱히 선택지가 남아있지는 않네요. 그 과정에 영주나 마을사람에게 들킨다면 영주의 숲을 침범한 대가로 사로잡힐테니 극도로 조심스럽기도 해야할 것 같습니다.
3. 일단 어찌어찌 살아남고나면 가죽과 고기들이 제법 생길 것입니다. 둘다 중세의 장원경제에서 매우 귀하게 여기는 보물들이지요. 그것들을 몰래 가져다주기를 한동안 반복하다가 대충 가죽과 고기를 충분히 가져다줘서 우호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으면 가죽과 고기를 들고 대낮에 방문해서 당신이 그동안 가죽과 고기를 가져다줬음을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물론, 당신을 사로잡아 노예로 삼으려할 수도 있으니 무기를 가지고다니던가 여차하면 도망칠 준비를 반드시 해둬야겠지요.
4. 마을 사람들에게 고기와 가죽을 계속 가져다준다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정도가 된다면 눈치껏 마을의 유력자를 파악하고 그 유력자에게 고기와 가죽을 몽땅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유력자는 당신을, 스스로의 위신을 증강시키기 위한 이색적인 짐승처럼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력자의 보호 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유력자의 보호 아래에서 계속 가죽과 고기를 바치면서 온힘을 다해 언어를 배웁니다. 현지의 언어를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보내는 하루 하루는 극도로 위험하니(유력자의 보호 아래에 놓여있다 해도) 하루라도 더 빨리 어눌하게나마 말할 수 있을만큼 언어를 배워야합니다.
5. 현지의 언어를 배우고 나면, 당장 어느 시대의 어느 지역에 있는지를 파악해야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가는 가장 빠르고 저렴하고 안전한 길을 찾아내야합니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을 찾아낸 후에는, 유력자의 재산중 훔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훔치고 말 한두마리도 훔쳐서 달아납니다. 왜 굳이 위험하게 재산을 훔쳐야하냐면 밑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마을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는대 달아나야하냐면, 중세의 마을은 어느 시대의 어느 곳이던지 매우 위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마을이라면 아무리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소말리아에서 맨몸으로 노숙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위험합니다. 반드시 이탈리아의 도시로 가야합니다.
중세의 마을에서 산다면, 용병들에게 약탈당할 수도 있고, 영주의 징집병에게 약탈당할 수도 있고, 15세기의 중세 후기에 산다면 어느날 뜬금없이 마녀사냥을 당할 수도 있고, 11세기 이전의 중세 중기와 중세 초기에 산다면 뜬금없이 나타난 바이킹에게 약탈당해 가진 것 모두 빼앗기고 죽거나 노예로 팔릴 수 있고, 이교도들의 성전에 휘말려 마을 하나가 통채로 지워질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서쪽에서 온 십자군들에게 학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과 안티오크의 시민들을 카톨릭이든 무슬림이든 상관하지 않고 학살했으며 4차 십자군은 헝가리왕의 도시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정교회 제국인 비잔틴 제국의 내전에 참가해 많은 땅을 약탈하고 학살했으며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그곳의 수많은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6.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면 이탈리아 북부에 넘쳐나는 수많은 도시중 원하는 곳에 정착해서 가져온 재산을 밑천으로 원하는 것을 하시면 됩니다. 체인메일과 석궁 사서 용병이 될 수도 있고, 배 한척 어찌어찌 구해서 지중해를 누비는 무역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상점 하나 차려서 도시 안에서 남은 일생을 보내는 상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상점 하나 차리는 것을 추천. 상점 차리고나면 아주 지루한 삶을 살겠고 평생동안 도시 밖으로 나갈 일도 생기지 않겠고 현대와 비교하면 끔찍한 치안과 불법적인 수단을 자유자재로 동원하는 거상 사이에서 위험을 느껴야겠지만, 그래도 중세의 다른 삶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네, 중세의 삶중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삶은 현대의 가장 비루한 삶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고 빈곤하고 지루합니다. 그러니 중세시대로 회귀하신다면 그것은 기회가 아니라 끔찍한 불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로의 회귀는, 누가 당신을 꽁꽁 묶어서 소말리아 한복판에다 뜬금없이 떨어트리고 오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니까요. 아니,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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