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읍에서 살던 1992년 4월에 운전면허를 따고, 장롱면허임에도 불구하고 겁없이 옆 도시로 자동차를 몰고 갔습니다. 도로연수를 받지 않고, 그냥 면허만 딴 상태였으니, 무척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아무튼 옆 도시를 가 보니, 운전을 버벅이게 됩니다. 가야할 길 표지판도 봐야 하고, 바로 앞의 신호등도 봐야 하고, 백미러도 봐야 하고, .... 평소에 조수석에 앉아서 보던 것과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수석이나 뒷좌석에 탔을 때는 큰 빌딩이나 간판, 지나가는 예쁜 아가씨, 먼 곳의 경치 같은 것을 보았거든요. 그리고 그 순간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죠.
제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남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은 책에서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들은 것도 없는데, 갑자기 스스로 알게 되는 지식이죠.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운전석과 조수석의 두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다르다. 사람은 각자의 위치와 방향에서 세상을 보게 되고, 이 모습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모습의 세상을 보고 자라게 된다. 그러니 사람들의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를 다양성이라고 봐야 한다. 내가 본 모습만이 진리이자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고, 다른 사람이 본 모습도 얼마든지 참일 수 있다고 생각해야 잘한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는 남산이 있죠. 남산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북쪽에서 남산을 볼 때, 남쪽에서 남산을 볼 때, 동쪽에서 남산을 볼 때, 서쪽에서 남산을 볼 때 모습이 다 다릅니다. 사람이 서 있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서 남산의 모습도 다 다르게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저는 그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고, 제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려고 했더랬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은 각자 나름대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비록 내가 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함부로 비하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동설을 믿는 사람과 지동설을 믿는 사람, 창조설을 믿는 사람과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서로 의견이 180도 다릅니다.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죠. ‘나는 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며, 너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관용을 발휘하면, 두 사람은 공존할 수가 있습니다. ‘내 의견은 옳으니까, 너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네 의견은 존중하지 않겠다’고 관용을 발휘하지 않으면, 두 사람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발휘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듯합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이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이 필요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관용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제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이 나오더라도 화를 내는 일이 적어졌지요. ^ ^ 억지로 남을 설득하려고 들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냥 제 의견을 말하는 정도에 그쳐도 마음이 만족스럽더군요. 이 마음 이 경계를 잊지 않아야 되겠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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