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사 캐릭터는 뭔가 잘못 그려졌다.
내 성격이 변해서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일까.
고구마 100개는 먹은 캐릭터였다. 막판에 그런 결말을 맞이했어도 그리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로서 또는 영화로서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헐리우드 영화의 공식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1. 우선 저마다의 정의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캐릭터 하나로 표현해냈다. 그게 트리사.
2. 동료를 배반한자는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고 믿지만 실은 그 조차 이용해 먹는 정치적 조직 및 조직의 장이 존재하고, 결국 나중에 뒤통수 치게 된다. 헝거게임에 저항세력이 장이 그러했듯이.
차라리 트리사가 아닌 믿었던 남자동료였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추가로 자신의 욕망에 보다 충실한 그런 캐릭터로....
트리사는 애초에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는 자의 마음가짐은 결국 대의를 위해서라는 포장과 달리 옳은 목적을 가질리 없고 혈청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좋은 의도로 쓰일리 없음이다.
이러한 식의 상황설정은 수많은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애초에 트리사의 대의는 라스트시티에 모여 있는 자들을 위한 대의였을 뿐 모두를 위한 대의는 아니었던 셈이다.
영화속 악당중 최종보스들은 이렇게 늘 프레임을 짜놓는다. 초반에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주인공이 주변과 갈등을 겪으며 좁은 단위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런데 결국은 각자 믿고 있던 옳고 그름으로 인한 다툼이 실은 배우자에 의해 조장되었던 것이다.
메이즈러너의 결말은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다. 막판에 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박사에게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그렇게 쉽게 죽는게 오히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가 마지막까지 악역이었어도 상관 없었다.
왜냐면 박사와 트리사에 대한 연민이 거의 생기지 않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벌인 일이 어떤 용서가 개입될 여지가 적었기 때문. 게다가 박사는 협조자가 아니라 주동자였다.
둘째 개발을 지원하는 위원회 같은 조직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99%는 다 알리지만 실은 결정적인 무언가는 숨기면서 박사를 이용했고, 박사는 자신의 뜻도 있지만 일부는 속은 점도 있다던가 했어야 막판에 용서가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동자였기 때문에 죽음으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 만큼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다.
좀더 부연하자면, 어차피 박사 역시 (가칭.기억이안나서) 위원회가 선택한 자들에게 치료제가 돌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위에서 적은대로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정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걸 뒤바꿀 수 있는 반전 설정이 필요한데, 그냥 지원을 받고 연구를 주도하는 역을 하다 막판에 실패하고 죽었을 뿐이니 무슨 연민이 생기고 공감이 갈까.
예컨데,
A라는 주인공의 동료가 자신의 욕망에 보다 충실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던 차에 위원회가 일부 사실을 속이고 손을 내밀자 이상함을 느끼지만 애써 무시하고 협조하게 된다. 위원회에 속아 예상치 못한 일로 동료 중 일부가 희생되자 내가 과연 잘한 것일까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더 크고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기 전까지만 진행되다 일부 희생된 동료에게 죄책감을 느끼다 스스로 희생하여 주인공 일행을 돕다 죽는다.
이런식이 전형적이지만 납득가능한 수준에서 그려내었다면 더 나았을지 않을까.
트리사는 실제로 자신의 생각을 믿고 그리 행동했으니 더욱 발암이라는 말. 굳이 트리사여야 했다면 80%는 신념이고 20%는 속는 식이었다면...다른 동료 A가 자신의 욕망 50%, 신념 20%, 나머지 30%가 속은 점이었더라면 나았지 않을까.
아무래도 트리사는 그 도시안에 있는 자들 일부만이 살아남더라도 인류가 생존하는 자체가 바로 정의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자들을 희생시켜가며 남은 마지막 도시가 아니던가. 그래서 더욱 공감도 안되고 용서도 안되는 것 같다. 비록 영화속 캐릭터지만 영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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