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고무판 여성무협독자들의 소모임인 홍우예향담에서
'무협에서의 강간'에 대해 언급하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글쓰신 분의 말씀인 즉,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여자가 그 상황에 '희열'을 느끼고
그 때문에 후에 남자를 죽일 상황에서도 그로 인해 망설인다는 내용이
여자의 입장에서 불쾌하게 다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다른 여성분들도 그 말에 상당히 동의하셨고
저 역시 고개를 끄덕였었죠.
그러나 문제는 저런 '강간에 대한 인식'을 대부분의 남성무협작가들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여자가 쾌락에 몸을 떠는 장면은 수많은 글들에
등장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것도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수작'이라 평가받는
작품들에서도 종종 차용되곤 하죠.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건데,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남자들은 강간을 '성행위'라고 인식하지만,
여성들에게 강간은 그냥 '폭력행위'입니다.
또한 '순결을 잃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지의 박탈과 상실'로 인해
자아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상처입을 수 있는 끔찍한 '폭력'입니다.
더구나 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간당하면서 쾌락을 느낀다는 건 솔직히 '개소리'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여성이 느끼는 성- 성행위 시 오르가즘에 이르는 과정을 포함한-에 대해
무지한 남자들의 편견에 다름아니죠.
서두가 많이 길어졌군요.
시작부터 강간 운운하게 된 것은 아래에서 흑응님이 게시한
'배려하는 성문화'에 대한 글에 달린 코멘트들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동안 쌓이고 쌓인 것이 폭발했다-에 가깝겠군요.
솔직히 그 코멘트들을 읽으면서 저는 상당한 분노와 처참함을 느꼈습니다.
코멘트를 다신 분들, 링크된 기사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셨는지요?
그 기사의 내용 어디에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가 '비난' 받아야할 부분이
있던가요?
어떤 분께서는 무려 '그럼 이제는 여자들을 위한 포르노를 만들어야 하나'라고
'비아냥'대기까지 하시더군요.
'성'을 즐기는 것은 남자들만의 권리가 아닙니다.
여자들도 성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남자들과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 땅의 남자들의 편견과 이기에 의해 멋대로 정의되어 감춰진 채 살아왔을 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습니다.
지금까지 고무판에서 느낀 여성에 대한 편견,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적'이라고 규정하며 내비치던 적대감,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받는 차별에 대한
무지 등등 솔직히 토론마당 등에서 보여지는 고무판 분들의 지적수준을 감안하면
여성에 대한 인식은 신기할 정도로 '저급' 그 자체이더군요.
그동안 느꼈던 부분에 대해 전부 다 얘기하려고 하면
몇날 며칠 떠들어도 부족할테고,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다 얘기할 수도 없고
설명할 자신도 없으니 함부로 쓰진 않겠습니다.
무협이란 장르가 원래 남자들의 '마초이즘'과 '성적 판타지'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게시판에서 무협의 가장 흔한 설정 중 하나인 '일부다처제'에 대해
얘기할 때도 저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조가 많더군요.
무협소설이 단순히 남자들의 대리만족적인 성적판타지 충족의 기능만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제가 딱히 더 말씀드려야 소용은 없겠지요.
하지만 무협이 진정한 대중소설로 자리잡고, 진짜 '작품'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면
남성중심적인 성의식-정확하게는 다분히 폭력적인-은 이제 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팔리지 않는, 인정받지 못하는 무협에 대해 분노하면서
소비자로서의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과 그 취향을
왜 무시하시죠?
(제가 느낀바로,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한 소비에
훨씬 적극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극히 비난하는 빠순이들이 보여주는 적극적인 소비형태나
귀여니를 필두로한 인터넷소설들의 판매량,
야오이로 대변되는 동인지들을 소비하는 독자들까지, 그 중심은 전부
여성들이죠)
무협에 덧씌워진 삼류라는 편견, 포르노, 야설이라는 이미지에 억울해하고
분노하며, 임준욱님 같은 작가분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통해하며
여전히 무협을 외면하는 많은 사람들을 원망합니까?
그러나 미안하게도 당신들에겐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협소설이 많이 달라졌다고, 예전의 포르노 야설따윈 없어졌다고 부르짖지만,
근본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소설에 그릇된 성의식과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난무하며
그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마초이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근본의식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변화를 보아달라고 한들, 설득력이 있으리라고
보시나요?
진정으로 발전을 바라고 많은 독자들을 받아들이길 바란다면
스스로를 반성하고 틀을 깨십시오.
아니면, 이대로 자신들만의 세계에 안주하시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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