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일관된 주제는 한국 고대문화의 뿌리가 ‘발해연안’이라는 것이다. 발해연안이란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 산둥반도, 서부 허베이성(河北省), 북부의 동북 3성을 뜻한다. 저자는 다양한 고고학 증거를 들어 일의대수(一衣帶水)로 연결된 한국 고대문화의 진실을 캐고 있다.
#‘은(殷)나라와 부여의 친연 관계’=전설상의 왕국으로 치부되던 은나라가 역사속으로 걸어나온 것은 1899년 한약재로 거래되던 갑골의 발견 덕분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기원전 17~11세기 사이 천하를 움켜쥐었던 은나라가 사실은 한민족과 같은 동이계이며, 고구려·백제와 같은 계통인 부여와 습속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은나라와 부여 모두 제천의식이나 군사를 일으킬 때 점을 쳤다. 그런데 초기 갑골문화의 고고학적 증거들은 한반도를 포함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 활동지역에서 폭넓게 발견된다. 결국 발해연안에 살았던 동이계가 황하하류로 서남향해서 은(원래는 商)나라를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하나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에는 “부여 사람들은 은나라의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흰색을 숭상했으며 흰 천으로 만든 도포를 입었다”고 돼 있다. 다른 문헌인 예기 ‘단궁상’편을 보면 “은나라는 흰색을 숭상했고, 흰색옷을 입었다”고 했다. 왜 부여 사람들은 은나라 역법을 쓰고, 은나라 사람들처럼 흰색을 숭상했을까.
이 대목에서 신화학자 정재서의 분석을 들어보자. “(동이계인) 은나라는 동방세력을, 주(周)는 오늘날 중국민족의 조상인 서방세력을 대표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폭군으로 몰아붙이며 천하를 빼앗은 것은 단순한 왕조교체의 의미뿐 아니라 중화주의의 출발을 뜻한다(‘이야기 동양신화’).”
#‘북방기원설은 이제 그만’=이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 비단 한족(漢族)만의 것이 아니라 동이계 등 주변 민족과 공존 혹은 경쟁하면서 이뤄졌다는 것. 또하나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가까운 발해연안에서 찾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문화의 원류는 시베리아, 즉 북방문화가 아닐까 하는 게 주류였으니까.
토기의 기하학 무늬가 북방인 만주·시베리아는 물론 핀란드에까지 분포돼 있다는 점에서 북방전래설의 전거로 활용된 빗살무늬토기를 보자. 하지만 이런 무늬토기는 한반도는 물론 발해연안에서 너무도 폭넓게 확인된다. 시베리아 출현시기보다 1,000년이나 이른 시기에…. 저자는 빗살무늬 토기문화의 유행을 ‘발해연안문명의 여명기’로 표현한다. 또 한국 청동기문화 원류를 ‘스키토-시베리안’이라고 퍼뜨린 일제시대의 관학자 에가미의 예를 들며 실소한다.
“에가미가 시베리아 동물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꼽은 이른바 수원(綬遠·몽골 오도로스 지방) 청동기는 중국의 고물상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런 비학술적인 자료를 가지고 스키토-시베리안설을 퍼뜨린 걸 믿고 따르는 우리 학계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1만9천원.
한국사 미스터리]‘한성백제 500년 역사’찾아낸 이형구
[경향신문 2003-05-26 16:03]
2001년 어느 날이었다. 기자가 어느 고고학자를 취재하다가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던데…”하고 묻자 그 교수는 한마디 툭 던졌다. “이형구 교수가 누구죠?”. 기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풍납토성을 ‘발견’함으로써 잃어버린 한성백제 500년 역사를 부활시킨 이형구 선문대 교수. 철저하게 무시당한 ‘한성백제의 슬픈 역사’를 닮았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국립 대만대 고고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주류학계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았다. “이형구가 누구냐?”는 말은 바로 그 따돌림의 상징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아무리 풍납토성 등 한강유역 백제유적의 중요성을 떠들고 다녔어도 그에게 돌아온 말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끈질기게 도전했다. 1,500평에 불과했던 석촌동 유적보호구역의 범위를 1만7천여평으로 늘려 놓았고 85년엔 올림픽 대교를 사이에 둔 강북~둔촌동 도로계획(풍납토성을 관통하는)도 바꿔놓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97년 새해 우여곡절 끝에 현대아파트 공사장에 들어가 ‘폼페이 발견’에 비견된다는 풍납토성의 존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그럴 리 없다”는 학자들의 무시와 경멸, 그리고 재산권을 침해받는 주민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집까지 찾아와 자행하는 갖가지 협박과 “어떤 X이 이형구냐”며 퍼붓는 욕설을 당해야 했고 때로는 멱살을 잡혔다. 심지어는 ‘이형구 화형식’까지 벌어졌으니…. 그러나 역시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건 기존학계의 무시이다. 통설이라는 건 그야말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통설을 신주 모시듯 하면 학문발전이라는 게 있을까.
이교수가 지금도 어이없어 하는 건 어떤 교수가 풍납토성 발굴 때 했다는 말이다. “(유물이 나온다 해도) 개인의 재산권이 중요하므로 보존은 불가능하다.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며 비민주적인 발상이다”라는 요지의 발언. 그런데 지금은 “풍납동 같은 중요한 유적에서…”라는 말을 한다니. 최근 풍납동 주민들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소규모 주택의 증·개축은 허용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60여곳의 증·개축 공사현장에서 단 한 곳의 예외도 없이 백제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한성백제 500년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역사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이기환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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