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을 쓰면서 적당한 어휘를 선택하려고 하나의 문장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정작 제가 쓰고자 했던 것을 망각하고 그저 표현에만 집착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심란하던 차에 프로작가분이 쓰셨던 글이 하나 떠올라 끄적여봅니다.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이름도 기억이 안 납니다-에 올리셨던 글인데, 글을 쓰면서 총 세번의 위기가 닥친다는 내용이었죠.
첫번째 위기는 첫 삼장에 이르렀을 때 온다고 합니다. 첫 삼장이 저자가 가장 자신있게 쓸 수 있는 부분이고,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잘 함축하여 이제 막 전개를 시작하는 도입부죠. 그런데 초보작가의 경우는 여기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인 나머지 뒤이은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심지어 나름대로 설정과 플롯을 짜지 않고서 그냥 써보자 식으로 쓴 경우에는 여기서 소재가 고갈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위기는 책 한권 분량-대략 15만자 정도의 분량-이 되었을 때 온다고 합니다. 나름 치밀하게 설정하고 플롯을 짜고 글을 쓴 경우엔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보작가들이 여기까지 쓰고 나면 소재가 거의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에피소드를 만들어 끼워넣다 보면 개연성이 떨어지고 작중 인물들의 관계도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못하며, 최초에 작가가 쓰고자 했던 것들이 무너지게 된다고 합니다.
세번째 위기는 책 세권 분량이 되었을 때 온다고 합니다. 앞선 두번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서 맞이하는 이 위기가 극복하기가 제일 힘들다고 하는데요. 장편을 써보지 않은 작가라면 책 세권을 썼을 때 그야말로 더이상 쓸 거리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다지 많은 분량이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는 책 세권이 아주 방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 8~90년대에 나오던 무협지들이 거의 대부분 상중하 세권으로 완결이 나는데, 바로 이런 이유죠.
반면 책 세권을 넘길 수 있을 역량이 된다면, 그 이후엔 책 한권 분량 정도는 사소한 에피소드로도 뚝딱뚝딱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떠올린 에피소드를 앞선 글과 잘 짜맞추는 것이고, 전체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제 경우는 두번째 단계를 조금 지나 있습니다. 19만자 정도 되니깐 한권 하고 1/3정도를 썼네요. 제가 호흡이 길다보니 글도 길게 쓰는 습관이 있는데, 덕분에 스토리가 좀 늘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다른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는 것 같은데 ‘최초에 작가가 쓰고자 했던 것’이 조금 걸리네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그리고 저를 일깨워주신 가리온님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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