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유민수
작품명 : 불멸의 기사
출판사 : 너와나 미디어
어디에나 그렇지만, 글판에도 홀연히 등장하고 사라지는 이들이
있다.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마저 아는 이 없고, 그
러니 사라지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의 등장하
던 모습을 간직한 채 '아…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
까?' 궁금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환타지 소설 작가 ' 유민수.
20세기의 끝자락인 1999년부터 2000년 말까지 열한 권, 단 두 편
의 이야기만을 훌쩍 던져놓고, 그 20세기와 함께 터벅터벅 역사의 뒤
안길로 사라져버린 사람.
그가 사라진 지 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이따금 그가 남겨둔
이야기를 읽으며 옛 노래를 흥얼거린다.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그 사람은 어
디쯤 가고 있을까…"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이미 사라진 다음인 21세기였다.
또한 그를 알게 된 이유 중의 가장 큰 부분은 사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볼 게 없어서 반쯤 속는 셈치고 에잇! 집어든 게
'마경의 기사'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표지 안쪽에 낙서하듯이 휘갈겨 넣은 문장 때문이었지,
다른 건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 한 번 읽고 던져버릴 그런 책이었다면 내지 않았다!
당연히 얄팍한 광고카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뭐, 그
럼 속아주지'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뭔가를 기대하기에는 우선 표지가 너무 유치찬란했고 (표지 공모
에까지 응모할 정도로 그의 열성 팬이었다는 어느 분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작가의 나이도 어린 데다가 (75년생, 출판일은 99년.
겨우 스물 다섯 살에 썼다는 거니까…), 무엇보다도 당시의 나는 '드
래곤 라자' 이후로 홍수처럼 쏟아진 이상한 것들 때문에 환타지라면
넌더리가 난 상태였다.
무협이라면 어느 정도 이상해도 봐줄 만 한데, 도무지 환타지라면
봐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무 기대도 않고 뽑아들었던 '마경의 기사'를 읽고
나서 나는 꽤 놀랐다.
어? 이 사람 대단한데?
표지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마경의 기사'에서는 단 한 줄의 유치
함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특유의 안정된 작가적 기
량이 탄탄하게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소설다운 이야기를 구상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구상한
이야기를 소설답게 포장할 뿐만 아니라,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서 자
신만의 독특한 색깔까지 입히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 정도까지였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나고, 특히 마지막의
대반전은 기존의 상식을 과감히 뒤집어엎는 듯한 충격과 신선함의
절정이었지만, 어딘가 전체의 맥락이 삐그덕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일단은 빼어난 작가의 뛰어난 작품인 게 분명해 보였
고, 그래서 나는 곧바로 그의 다른 작품을 구해왔다.
'불멸의 기사'
그리고 나는 마침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 한국 환타지 장르에, 사실은 두 명의 '소설가'가 있었다는 것을.
물론 환타지 장르에도 뛰어난 작가는 많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소설가'는 이영도 씨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의 작품을 환타지가 아닌 소설로 읽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뛰어난 분들, 이를테면 이수영 씨나 전민희 씨 등은
좋은 환타지 작가이긴 하겠지만, 소설가는 아니었다.
완전히 내 멋대로의 판단기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
영도 씨만을 소설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맙소사! 또 하나의 소설가
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엄격하게 말해서, '불멸의 기사'는 환타지가 아니다.
환타지를 살짝 덧입은 소설이며, 굳이 명명한다면 '환상소설'이라
는 범주에나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중세를 배경으로 처절하리만치 고독한 일생을 살다간 철가
면의 기사 '얀 지스카드'의 일대기를 매혹적으로 그려낸 1부 명예
(Honor) 편.
그리고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혁명기의 프랑스를 그대로
빗대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2부 번뇌(Vexation) 편.
이 두 개의 이야기가 합쳐진 '불멸의 기사'는 완벽한 상상인 동시
에 완벽한 현실이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고도 죽지 못하는 고독한 기사라는 컨셉은 너
무나 환상적이며,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사실은 혁명군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변신이라는 상상력은 또한 얼마나
기발한가?
솔직히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지극히 환상적인 이야기가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정
교하게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1부의 중세는 물론이고 2부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는 더더욱 현실적이었다.
신을 '마그스'라 부르고, 프랑스를 '브리타니'라 부른다고 해서 그게
중세유럽이고, 혁명기의 프랑스라는 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아무리 기괴한 환상이라고 해도, 그 바탕이 너무나 확고한 현실이
라면, 그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다. 단지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실제로 환타지라는 장르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한국의 환타지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 오히려 비현실적일
수록 환타지, 이름 그대로 환타지로 인정받는 것이다.
내가 '불멸의 기사'를 환타지로 구분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
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내가 '불멸의 기사'에 매혹된 건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재미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 담겨진 역사와 철학, 종교와 인간에 대한 예리한
성찰은 매번 되풀이해서 볼 때마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다.
한 십 년쯤 더 산 다음이라면 '흠, 약간은 유치하군' 할 지도 모르
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의 나는 '겨우 스물 다섯 살이었던' 그의 세
계관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다.
또한, 유민수 씨는 그 모든 감탄할 만한 것들을 소설적 재미로 멋
들어지게 제단해서 내놓았다.
이 정도쯤 되면 항복할 수밖에 없다.
나보다 몇 살이 어리건 어쨌건 '오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인
것이다.
무엇에 대해 재미를 느끼는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의 재
미란 '맵시있는 문장으로 핵심을 푹푹 찌르는 화술'과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줄기가 얼마나 또렷하게 형상화되는가'에서 판가름난다.
유민수 씨의 화술은 가히 이영도 씨에게 뒤지지 않고, 그 선명함
은 오히려 더 뛰어나다.
이영도 씨가 경쾌한 비유를 통해 산뜻하게 제시하는 식의 화술이
라면, 유민수 씨는 사정없이 곧바로 찔러 들어가는 식이다. 간혹 그
과정에서 너무 진지해진 나머지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그 음울함마저 좋았다.
그 덕분에 단숨에 질러나가지 못하고,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으니까. 그것도 한자 한자 또박또박. 그리고 매번, 몇 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 번에 쭉 읽히는 것이야말로 장르소설의 덕목이다, 라
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려고 소설을 읽는 게 아니듯이, 예술적 감동
을 얻기 위해서 장르를 읽는 건 아니니까.
장르는 읽는 그 순간에 매혹되어,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그 순간
만 지나면 홀딱 깨버리는 게 좋다.
이 명제에 이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유민수 씨를 '소설가'로 부르
고, '불멸의 기사'를 소설이라 칭한다.
'불멸의 기사'는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며 산을 오르듯이 읽어야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휑하니 오르거나, 경주하듯이 달려가면서 읽
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걷다가 멈춰서 주위를 돌아보고, 숨도 고르고, 바람도 느끼고…그
러면서 내가 올라가고 있는 산 전체를 느끼듯이,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게 '불멸의 기사'인 것이다.
그래서 '불멸의 기사'는 소설이다.
어쩌면 유민수 씨가 우연히라도 이 감상문을 보게 되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어이, 이봐. 나는 '불멸의 기사'를 환타지로 썼단 말야.'
그래도 상관없다.
쓰는 게 그의 마음대로인 것처럼, 읽는 건 내 맘대로니까.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 바이지만…
만약 유민수 씨가 한국인이 아닌 프랑스인이었다면, 그래서 이 '불
멸의 기사'가 프랑스인이 쓴 소설이었다면…
프랑스는 그를 꽤나 자랑스러워했을 지도 모르겠다.
(음…너무 과장된 찬사인가? 그러나 적어도 내 생각에, 그는 충분
히 이런 찬사를 들을만한 자격이 있다.)
# 아! 이런, 명색이 감상문이면서 가장 찐했던 감동을 빠뜨리다니.
2부가 끝나가던 즈음, 현재는 '아르카르' 천년 전에는 '얀 지스카드'
였던 이가 어째서 천년의 시간 동안 왕국의 일부로 계속 존재했던
것일까 의아해하는 부분이 나온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고요히 은거해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
을 텐데...
그는 왜 계속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한사코 왕국의 일원이
되어 황제를 보살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얀 지스카드'의 독백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의
문과는 상관없다.
의문의 해답은 간단하다.
너무 간단해서 차라리 감동적이었다.
브리타니 왕조의 역대 황제들은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 '시에
나'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천년에 이르도록 묵묵히, 사랑했던 여인의 후손을 보살피던 남
자,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의 심장마저 내놓으면서까지 마지막 후손
의 미래를 열어주었던 남자.
그 거대한 사랑에 나는 완전히 감동하고 말았다.
뭐 역시나 내 멋대로의 감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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