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렸을때 부터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매우 특이한 녀석이었다.
여기서 특이하다는 것은 아이의 지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가 아
니다. 아이에게 이런말을 쓴다는건 어울리지 않지만 그 녀석은 성정이 과묵하고 살
기가 짙은 아이였다. 어미를 일찍 여위여서 그런지, 타고난 성질이 그리된 것인지,
두세살 터울의 제 형과는 전혀 딴판인 녀석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노독행(路獨行)
제 갈길을 혼자 간다는 그 이름에 걸맞게 다섯살때 모욕을 듣고 혀를깨물어 아버지
의 친구를 기겁케 했다던가, 역시 비슷한 이유로 형의 친구의 한 팔을 식도로 베어
버렸다는 얘기는 노가살수문(路家殺手門)의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있는 이야기였다.
그에 비하면 녀석의 형인 군행(君行)은 얼마나 뛰어난가? 강남의 손꼽히는 후기지수
중 하나이며 천하이대미녀중의 하나이자 강남제일 문파인 천상회주의 금지옥엽인 사
마표향의 약혼자로 내정된 사내가 아니던가. 장차 노가살수문을 이어받을 소문주로서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는 형을 독행은 어려서부터 말없이 따랐다. 그의형도 독
행을 아무런 편견없이 아껴주었고 가문에 안착하지 못해 항상 외지로 사냥을 하며 떠도는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곤 했다.
살아야 한다.
너만은 꼭 살아서 우리들의 복수를 해줘야 한다.
우린...널 믿는다.
고통스럽다. 살아서 이런 고통을 겪을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만큼! 하지만 현실은 뇌리에 지을수 없는 화인을 찍어놓았고 입가엔 아직도 비릿한 혈향이 감돌고
있었다. 육십여 식솔들의 한을 담은 혈배(血杯)의 비릿함이...추적을 뿌리치느라 몸
은 걸레만도 못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생명은 타오르는 심지처럼 꺼져가지만 눈
빛만은 상처입은 야수의 그것처럼 생생히 살아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잘려져 되돌아온 아버지의 손, 항쟁의 결의, 단지의 혈배, 형이 보여준 마지막
눈빛.모든 장면들이 하나하나 스쳐지나가며 안녕을 고했다. 믿을수없게도 그것은 단지 오늘 하루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형은...죽었겠지. 이미 피구멍이 되어버린 눈
을 제외한 다른 눈에서 지독한 광망이 흘러나왔다. 전신을 파고드는 엄청난 고통이
뇌리에서 지워진지는 이미 오래였다. 죽여버리고 말겠다. 모두 다 죽여버리고 말겠
어! 다시는 사람의 그늘에 들지 못한다해도, 더이상 인간이 아닌 악마라 불린다 할
지라도 이 혈채를 갚을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버리겠다. 남겨진 혈채를 갚지
못한다면 난 결코 살아도 산게 아니야.....
독고무정은 노독행이 참 북해의 하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짙고 우중충한, 사시사철 맑은날이 드문 북해의 하늘은 놈의 죽어버린 잿빛의 눈빛과 놀랄만큼 닮아있었다천년동안 오직 한 사람에게만 비전되어온 실전무예 무쌍류(無雙流) 그 지옥같은, 고
련이라는 말이 참으로 우스워뵈는, 필사의 각오로 점철된 무예전수가 모두 마무리 된 지금 독고무정은 전에없는 온기가 스민 눈빛으로 제자를 훔쳐보았다. 솔직히 불
가능 하다 여겼다. 처음 초주검이 된 놈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무쌍류를 가르칠 때만
해도 자신이서지 않았다. 어디하나 특출날 것이 없는 재질, 오직 죽음직전에 보여준
놀랄만한 살기에 반해 놈을 거두었지만 천년의 무쌍류는 결코 각오하나만으로 쉽사리 전수될 수 있는 무예가 아니었다. 하지만 놈은 잘 견뎌주었다. 사문의 업을 잇지
못한 못난 자신을 채찍질하듯 그리도 혹독하게 가르쳤건만, 식인늑대떼에 던져져도,
진의는 커녕 일언반구도 없는 구타에가까운 수련 속에서도 독행은 그의 기대에 묵묵
히 따라와주었다. 놈의 손에서, 무쌍류의 전설이 되살아나는것도 이젠 멀지 않은것
이다. 자신은 볼 수 없겠지만...빙하를 오르는 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무정한 놈,
뒤도한번 돌아보지 않는구나. 그래 가거라. 너를 그렇게 만든것은 바로 나이거늘, 네
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천년의 짐을 지운것이...나는 이제 짐을 내려놨으니. 허허,
북해의 차가운 바람속에서 독고무정의 몸은 그렇게 싸늘이 식어갔다.
무쌍류는 항상 혼자였어.
하지만 누구도 꺽을수 없었지.
그래서 무적(無敵)이야.
마지막 상대의 몸속에 월영도를 박아넣은채로 노독행은 스산히 뇌까렸다. 이미 상대
였던 노괴물은 절명한 상태였지만...온 몸은 도살장의 고기처럼 처참한 상처들로 뒤
덮여 있었다. 도끼에 반쯤갈라진 왼팔은 덜렁거리고, 숨 쉴떄마다 부러진 갈빗대가
폐부를 도려내는듯 했다. 혈겁의 그날이후로 이렇게 처참히 당하긴 처음이었다. 하
지만 상대가 천상회 전체라면야...몸은 망가지고 머리에선 강렬한 경고의 신호가 울
리고 이었지만 노독행은 싸그리 무시해버렸다. 원수가, 눈앞에 있었다. 몸이 말을듣지 않는다면 영혼이라도 지옥끝까지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미친듯이 달려가는 그의
눈앞에 문득 그녀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건 왜일까? 돌아오겠다고 했는데...그 순간
멸천지관이 발동하면서 천상회는 대폭발해버렸다.
그녀가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분명히 기다린다고 했는데.
복수도 마다하고 허겁지겁 개처럼 달려왔지만 있어야 할 곳엔 그녀가 보이질 않는다
감히 들어왔던가. 언제부터 허락도 없이 나의 굳어진 마음속에 애정이라는 싹을 틔
워버렸나. 피로 점철된 복수의 길, 인간이기를 애초에 포기한 나를, 천만근 무게의
혈채에 짓눌려 괴뢰로 전락해버린 나를.. 어쩌면 구원해 줄지도 모를 그녀가 이렇게바람처럼 사라져 버린것이다. 은밀한 희망을 맛보게해준 그녀가.....
으아아악ㅡ! 아아악ㅡ!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ㅡ!!!!
노가살수문의 육십여 식솔들이 묻혀있는 커다란 봉분앞에 주저앉은 노독행은 하나남
은 외눈으로 봉분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혈채는 갚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만족감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욱한 허무감만이 온 몸을 지배할뿐이었다.
이젠 얼굴도 잘 기억나지않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노독행은 조용히 뇌까렸다.
다들 들어봐. 당신들이 그렇게도 바랬던 원한은 모두 정리되었다. 한낱 짐승도 먹을
만큼만 살생을 하는데 나는 악귀처럼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어, 날 모두가 피도 흐
르지 않는 악귀, 살인기계 냉혈무정 이라고 하더군. 그 날 내어깨에 당신들이 올려
놓은 혈채를, 꿈속에서조차 바라마지않던 독촉에 결국 이루어냈다고...날 악귀로 만
들고 말이지, 순간 노독행의 눈에 지금까지 어떤 상대에게서도 내비치지 않았던 살
기짙은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 편히들 저세상에 가라고, 다만 다시한번 내게 이런일을 짊어지게 한다면 그
때는 정말 가만두지 않아.....
망설이지 마라. 그대로 찔러넣어.
내가 미쳤어! 난 인간도 아니야, 동방립은 비수를 내동댕이 치고 친구를 바라보았다인생에 있어 둘도없는 친구, 아내늘 좋아하는 남자, 그리고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
애증이 범벅이된 시선으로 노독행을 바라보던 동방립의 눈앞이 흐려졌다. 할 수만
있다면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놈의 멱살을 움켜잡고 따져보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목울대에서 짐승같은 울음이 터져나왔다. 한순간의 욕망을 못이겨내 친구를
암해하려 했던 자신이 미치도록 미웠다. 애초에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그녀가 이
제라도 행복을 찾아 떠난다면 자신은 당연히 보내주어야만했다. 설령 그 대상이 친
구였을지라도...그렇게도 그녀의 행복을 바라던 자신이 이런 짓거리까지 감행하며
친구와 아내의 행복을 막아버리려 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 무슨 개 같은 추
악한 욕망이란 말이냐. 친구는 이리도 못난 나를...이리도 못난 나를 이해해주고,
내일 결전이 끝나면 그녀와 함께 강호를 떠나.
세외에 터를잡고 행복하게 사는거다. 립동
왜, 라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는 유약한 친구에게 노독행은 조용히 말
을 매듭지었다.
친구의 아내는 안지않아.....
하늘과 땅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해의 대지. 언제나처럼 잔
뜩 찌푸린 하늘아래엔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빙하군이 균열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
었다. 먼 곳 천장의 단애끝에 우뚝 선 흑포사내는 이런 자연의 장관에도 별다른 감
흥이 없는지 팔짱을 낀 오연한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흑포, 북해의 잿빛하늘은 묘하게도 사내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ㅡ장장 세 시간 동안 6년 전에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글을 썼습니다.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하고 써서 그런지 다른 감상문들 하곤 느낌이 틀린 것 같아 만족합니다.
이것으로 독보건곤의 일부분이라도 표현해 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어설픈 솜씨로
대가의 작품을 버려놓지는 않았나 심히 걱정되고 있습니다. 용대운님 최고입니다.
군림천하 잘 보고 있습니다~ 건필하십시요. 꾸벅,
추신 ㅡ 윗글은 본 책의 내용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 그라면 이랬을 거라, 생각
했던 점을 추가해써 쓴 글입니다. 혹시나 안 보신 분들은 윗글이 원래 본
책의 내용 그대로라고 생각하시면 안되요~헤헤 감상문도 개성을 살리려
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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