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선계]는 완간을 기대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던 작품 중 하나였는데,
이처럼 멋진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감상이란 책을 읽고 그 감흥을 쓰는 일인데,
오늘의 감상은 읽기 전에 책을 바라보며 드는 느낌을 적는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해가 바뀌면 서른 여섯이 되는 작가가, 스물 여섯 백수
시절에 쓰기 시작했다는 작품이 바로 이 [쟁선계]이다. 쟁선계를 기다리며 이십대
청춘을 바쳤다는 얘기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하이텔 무림동에 처음 [쟁선계]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 1994년 10월 이였다. 2000
년 7월까지 7년간의 연재를 이어 오면서 두어 번 연재를 중단하는 일이 발생했었으
나, 그 명성은 더욱 높아져 전설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끄는 작품이 됐다. 재미있는 것은 하이텔 무림동의 흥망성쇠가 쟁선계와
같은 길을 간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무협을 논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하이텔
무림동이 쟁선계가 빠져나간 이후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을 보면서, 고인 물은
썩는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참고로 지난 여름에 쓰여진 이 책의 서문에는 무림
동에 연재물이 남아 있다고 하나, 지난 10월 출판사의 요청으로 무림동에서 삭제되
었다.
이제 작품을 좀 살펴보자.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의 표지를 보자.
이 책이 특이한 것은 서점용과 대여점용, 두 가지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으
로 시도된 일인데 꽤 괜찮은 평가를 얻고 있는 듯 하다. 그 두가지 표지를 비교해
보면, 대여점용 혹은 총판용으로 불리는 신국판형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
는 보통의 무협소설과 그 형태가 다르지 않다. 허영만의 무당거미를 연상시키는
삐적마른 장발의 사내가 검과 도를 비껴 찬 모습을 그려 넣은 청회색의 표지를 얼굴
로 도서출판 시공사의 [드래곤북스] 시리즈로 발매되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시공
오리엔탈 판타지라는 자그마한 영문표기가 붙어 있고, 이재일 신무협소설이라 표기
되어 있다.
서점용 혹은 소장용으로 불리는 양장판은 멋진 하드커버로 나왔다. 대여점용과
마찬가지로 제법 알려진 일러스트인 형민우씨의 작품이 표지에 사용 됐는데, 검은색
과 회색이 어우러진 표지에 강렬한 붉은 글씨로 제목이 큼직하게 쓰여 있다. 이재일
장편소설이라 표기되어 있고, 네오 오리엔탈 환타지 스토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데, 드래곤북스 시리즈는 아니다. 커버를 넘기면 간단한 작가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
다. 작가 사진 대신에 안경을 끼고 모자를 눌러쓴 턱 긴(?) 남자의 커리커쳐가 붙어
있는데, [묘왕동주]에 사용되었던 작가 스스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벗겨 버리면 진정한 양장판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자주색 표지에 은색으로 빛나는 제목, 아무런 부제를 달지 않고 그저 이재일 장편소
설이라 쓰여진 심플함. 얼핏보면 10년 된 듯한 느낌, 자세히 봐도 10년 된 듯한 느낌
을 주는 제대로 디자인된 책을 만나게 된다. 디자이너 김명주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하드커버에 덧대여진 껍질(?)을 벗겨낸 후의 일이다. 그만큼
멋들어진 책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추천하는 글이 아니라 그 생김새를 찬양하는 이유는 서점에서 구입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무협이 서점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뜻 있는 이들의 시도는 총판과 대여점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무시되었
고, 그 때문에 무협의 주 독자층은 10대로 굳어지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
게 된다. 물론 불혹, 지천명의 나이에도 무협을 사랑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젊은 층의 호응에 비하면 그들의 비율은 너무나 미미하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아니
면 그저 남들이 다 빌려 보니까 빌려 보게 되는 무협이 서점을 통해 사서보게 되는
것으로 발전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서점용으로 발간된 책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300쪽에 못 미치는 많은 책
들이 있고, 그보다 두꺼운 소설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두 권을 통합해서
한 권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일견 무리다. 하지만 최초로 서점용과 대여점용으
로 구분해서 발매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한 권에
만 오 천 원, 이 만원이 비싸서 책을 못사는 사람이라면, 두 권에 만 칠 천 원도 비
싼 법이다. 아마도 이 책을 구입한 대다수는 오래 전부터 구입을 별러왔던 사람들
일 것이니 말이다.
또하나 어쩌면 논란의 여지가 될 수도 있는 [사치스런 책]에 대한 비판이다. 책이 사
치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표지가 두꺼울 필요가 있을까? 날로 발전하는 현대의 제본
기술을 생각해 보면, 종이의 질을 따져보면, 과연 양장판의 책이 필요한 것인가 하
는 원론적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쟁선계]의 양장판에는 애착이 간다.
이런 무협이 서가에 꽂히는 것이 가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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