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황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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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피아에서 새로운 소설을 낼 때마다 마르고 닿도록 문피즌들에게 까이는 작가가 있다. 황규영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다른 흔한 양판소 작가가 까이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공격받는다.
이 작가의 작품들을 비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요지는 그렇다. "묵직한 표사 소환전기 좋았다. 쉽게 읽히는 청바지에 박스티 첫 작품인 잠룡전설까지도 좋았다. 그러나 그 이후 작품들은 모조리 자가복제다!" 한마디로 당신 글 웬만큼 잘 쓰는 사람인데 왜 그러느냐는 거다. 잘 쓰려면 쓸 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잠룡전설 2부, 3부, 4부, 5부를 써대니 더 용서가 안된다는 거다. 뭐 그냥 재미없었다는 이도 있겠지만 아마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발전이 없다는 것.
조금 늦었지만 난 사실 황규영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 밝힌다. 그의 소설은 나오는 족족 두루두루 읽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금룡진천하 전질을 사서 관물대에 짱박아 놓고 읽었을 정도다. 지금까지 나온 그의 소설, 표사 소환전기 가즈블러드 천년용왕 잠룡전설 금룡진천하 천하제일협객 이것이 나의 복수다 천왕 참마전기 더 타이거 절대신마 개천 의기 다 읽었다. 정말 다 읽었다. 지겨워질 때도 있었던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재미없는 책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아직 그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문체는 가볍다. 하지만 마냥 밑도 끝도 없이 가볍기만 하진 않다.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와 재미가 보장된다. 이 부분은 취향차이지만 그래도 나는 대여점에 범람하는 양판소에 비해 황규영의 소설이 질적으로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어 편하게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극단적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나는 황규영의 소설이 하나의 입문 소설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좀 더 덧붙이자면, 어떤 친구 - 아마도 청소년이지 않을까 - 가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를 식히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처음으로 무협이라는 장르를 접할 때 황규영 식의 소설이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다.
이미 제법 많이 지나간 이야기지만 M본부에서 나는 가수다로 한창 화제를 끌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진정한' 가수들의 귀환을 반겼다. 그 당시 나 역시 기뻐하며 이런 좋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금 과한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지금까지의 '쓰레기 같은' 가벼운 아이돌 노래들만 듣다가 이런 노래를 들으니 귀가 정화된다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사실 아이돌 노래가 가벼운 것은 맞다. 이제 지금의 아이돌들은 나보다 열살은 어린 친구들이라 그런지 쉽게 풀이되고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부른다. 내용도 별 것 없다. 심한 건 노래 가사인지 뚜루뚜루뚜 뚜루뚜루뚜 다다다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만 중얼거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흥겹지 않은가? 재밌지 않나? 어떻게 사람이 묵직하고 충실한 고급스러운 노래만 듣나? 가요는 나이 많은 사람부터 어린사람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두루 듣는 다양성이 중요한 장르가 아닌가? 나는 UV의 이태원 프리덤 노래를 들으면서 낄낄대다가 소녀시대의 깜찍한 노래에 맞춰 춤도 춰보고 그러는 것이 즐겁다. 묵직한 노래를 듣고 싶을 때도 있지만 가벼운 노래를 듣고 싶을 때도 있다. 이게 이상한 건가?
장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나도 묵직하고 충실한 작품 중 하나인 군림천하 아주 좋아한다. 초반에 진산월이 기지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도중 겪는 고난과 굴욕, 분노에 같이 동화되기도 하고 중후반에 기연을 얻은 그의 행보에 가슴이 두근대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줄어드는 페이지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남은 페이지를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내가 전혀 장르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은, 아니 아예 소설이란 장르 자체를 읽어보지 않은 친구에게 책을 추천한다면 나는 군림천하보다는 잠룡전설을 추천할 것이다. 처음부터 군림천하를 추천한다면 그 친구는 아마 진산월의 고난과 굴욕에 오히려 짜증을 낼 것이니까.
다른 분들은 어땠는지 묻고 싶다. 처음 장르 소설을 어떤 책부터 접했는지? 나같은 경우는 처음에 양판소로 입문했는데 친구가 추천해준 반지의 제왕을 읽다가 집어던졌다. 뭐야 너무 재미없어! 하지만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내 서재에는 반지의제왕 3부, 호빗, 실마릴리온 까지 총 10만원이 넘는 양장본이 고이 꽂혀있다. 취향차이라는 말로 단정 짓기에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분이 조금 많을 것이다. 옛날에는 너무 무거운거 같고 별로 재미도 없었는데 같은 책을 내공이 제법 쌓인 뒤에 보니 너무 괜찮은 소설이었더라 이런 경험.
가볍게 머리를 식힐 의도를 가지고 장르 소설을 읽어보려 하는 사람에게 반지의 제왕이나 군림천하를 추천해준다면 좀 무리수 아닐까.그렇다면 최소한의 적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와 재미를 지닌 가벼운 소설을 추천해 줘야 하는데 나는 황규영식 소설, 청바지에 박스티 소설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또 덧붙이고 싶은 말도 있다. 황규영 작가는 도전을 멈춘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왕성하게 도전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작가의 말을 보면 더 걸어가야 하는데 못 갔다는 말이 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소설에 더 이상 구대문파가 나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소설 무대의 지명이 더 이상 중국의 지방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소설 주인공이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중국무협의 아류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한국무협의 틀을 깨고 있다.
이번에 의기를 보면서 나는 그가 정말로 자신이 고수하던 어떤 한계를 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상이 들었다. 의기를 보면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등장하던 모든 여자들이 남주인공을 바라보던 상황이 깨졌다. 물론 남주인공을 사모하는 여자들이 3명은 나오지만 딱 거기까지다. 절제를 찾았다. 대사가 가벼운 것은 고쳐지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무협소설의 등장인물들의 대사들도 거품과 기름기를 빼면 딱 저렇게 가벼운 내용의 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의기는 6권으로 조기 종결한 티를 팍팍내며 끝났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신작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힘차게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예전에 어떤 분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고집스럽게 홀로 자신의 명품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 있는가 하면 시전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릇을 만드는 도공이 있다고. 황규영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 황규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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