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정구
작품명 : 신승
출판사 : 북박스
나는 판타지, 무협에 입문한 시작이 아마 드래곤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드래곤볼이 왜 판무에 들어가느냐고 하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현실 이외의 다른 세계를 꿈꾼다는 건 <동화>이외엔 없었다. 그 이후로 차례차례 사이케델리아, 가즈나이트, 비상하는매를 통해서 초 6에서 중 2에 이르는 유년기를 보냈다.
사실 어떤 게 제일 재밌었다 아니다 할 마음은 없다. 사람마다 취향차이가 있다는 걸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강하게 느끼고, 어차피 자신만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글의 비평이라는 건 <왜 이렇게 못 쓴거야?>라는 황당함이라기보다는 <내가 쓰면 더 잘쓸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어있다.
판무를 읽어본 사람이 다 그런건지.
아니면 나만 그런건지는 몰라도 판무를 통해 구축한 정신세계는 상당히 유치하다. 나 자신이 현실감각이 없는 소년이었던 탓도 있지만 판무에 나오는 공허한 감각이 사람의 현실감을 떨어뜨린다.
적들은 늘 한 마디씩 하고, 주인공은 결정타 대사를 날린다.
선과 악이 늘상 구분되어 있고 누가 적인지 정해져 있다.
인간관계에서 주인공은 전능하다시피 하며 깊은 관계는 묘사되는 일이 드물다.
정구의 신승을 읽을 때까지는 나는 그 공허한 현실감을 바탕으로 현실을 더듬기도 바빴던 것 같다.
... 말하자면 정신병에 가까웠다.
판무에 나오는 인간관계를 실제로 도입해보고, 그게 왜 들어맞지 않는지 고민했다. 현실의 인간관계는 판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것도 아니고 화려한 것도 아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묵직한 중량감만이 느껴졌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기대했지만 뒷동네 산 정상의 암자를 바라보고, 맑은 산공기를 들이마시며 멍해지는 느낌이랄까.
고등학교때까지 갈등하고 있던 내게 정구의 엘란이란 책이 잡혔다. 엘란 자체는 내게 큰 충격이 아니었다.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고수들과 박투를 벌여나가는 엘란이라는 캐릭터가 멋있었지만 내 인생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된 건 엘란을 계기로 잡게 된 신승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진짜로 머리가 빠개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게 아니라 엘란에선 권수가 적어서 잘 나타나지 않던(그래도 9권씩이나 되지만) 작가 정구의 <인생관>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신승에서 주인공 정각은 늘 불평불만이다. 늘 띠껍다. 늘 비판적이다. 아무리 좋은 일, 영웅적인 일이 있어도 속으로는 그걸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자신이 있다. 이전까지 읽었던 판무에서 이런 일은 분명히 없었다.
물론 냉소적이거나 차갑거나 사악한 주인공은 있었다. 그러나 신승에서 주목할 점은 불평불만에 냉소를 심중에 함축해둔 것은 주인공 정각뿐만이 아니다. 주인공의 사숙, 사질, 나타나는 적들, 심지어는 별 비중없는 엑스트라에서 명망있는 무림고수들까지 모조리 <냉소적>이다.
읽다보면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척 보기에 영웅적이거나 좋은 일이 있어도 모두들 자기 주관에 따라서 냉소적으로 해석한다. 감동따윈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작가 정각은 판무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있는 <감동>의 카타르시스를 배제한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 신승을 읽었을 때는 절세신마의 포스와 정각의 레벨업만 바라보고 어거지로 15권까지 읽었다. 읽으면서 이 냉소적인 문체 때문에 얼굴 찌푸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승은 한 번 읽고는 수 년간 쳐다보지도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신승을 다시 꺼내보았을 때 느낀 것.
' 이건 왜 그 때랑 이렇게 느낌이 달라?'
약간이지만 인간관계와 경험이 쌓이면서 읽은 신승은 완전히 틀린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캐릭터의 심정도 대충 알 수 있게 되었고, 다소 복잡하게 꼬인 이해관계도 아 그럴만 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즉 두 번째 읽었을 때 신승을 읽는 포인트는 절세신마의 절세무공이 아니요, 정각의 레벨업도 아니다.
주발, 각종 후기지수, 명망있는 고수들이 얽히고 섥히면서 하는 발상이나 생각. 그리고 그 냉소적인 현실감을 처덕처덕 바르면서 삐걱삐걱 움직이는 <현실> 그 자체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신승을 통해서 다소나마 현실감의 두께를 체험하면서 알게모르게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물론 작가 정각의 인생관에 대해서도 비평할 거리가 매우 많다. 냉소적인 현실감을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일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 그런건 아니다>. 만일 신승에 그려진 대로만 인간들이 귀계를 꾸미고 속으로 호박씨를 깐다면 스트레스때문에 제대로 살기도 힘들다. 다소나마 과장된 면이 있다.
단지 신승은 내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이라고 하고 싶다. 다른 판무가 전설의 영웅담이나 대리만족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한다면, 신승은 차갑고 악의담긴 현실을 교묘하게 뒤섞어서 사람 눈앞에 들이민다. 어떤 식으로든 읽고 느낄 수 있는 게 많다.
신승, 일독을 추천한다.
2010/4/27 구로수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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