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을 보았다.
소설 속의 남자는
다른 여자와 함께 일견 다정한 포즈로 있는 모습을
애인에게 목격당했을 때,
그 모습에 그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이 분노를 금치 못할 때,
아무런 말도, 변명도, 핑계도 대지 않았다.
그 소설 속 남자의 요지는 이랬다.
'그 정도의 믿음도 없다면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졌을게다.'
그 남자는 오해의 여지가 충분한 장면을 목격당했음에도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 정도라는 데에 분노해서
'그런게 아니다.' 외에 단 한마디의 상황설명도 하지 않았다.
분명 오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는 후에 오해였음이 밝혀져
그 여자는 좀 더 그를 믿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러나 그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럴까? 사랑은 믿음일까?
혹여 어떤 사람이
30년간의 사랑을 한 5,6번 해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사랑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누가 감히 인간을 정의 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사랑을 정의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사는 주제에
누가 감히 무엇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다.
사랑에 대한 정의 만으로 수백 페이지에 걸친 '스크롤의 압박'을
느껴야 할 정도도 사람들은 그 것을 쉽게 한다.
어떤 것은 사랑이고, 어떤 것은 사랑이 아니고.
천만에!
80세의 괴테가 17세 소녀에게 고백을 하면 사랑이고.
80세의 노인정 할아버지가 노인정 옆 여고 1학년에게
고백을 하면 성희롱인가?
후에...
어떤 것을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천재가 나타나서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정의를 한다면,
아마도 그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
질투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다 주지 않고..
혹은 적당히 질투하고, 정당히 집착하고, 적당히 희생하고, 적당히..
다 이해할 수 없기에..
다 알 수 없기에..
절대로 완벽할 수 없기에..
인간이기에 사랑할 수 있음으로..
그 것에 감사한다.
- 판타지 소설 '뮈제트 아카데미'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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