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에 대한 감(感)뿐이었다. 우주라는 공간을 잘 이해하고 나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창작해내듯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거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모든 창작물은 나름의 탄탄한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전제 아닌가. 사람이 살고 있는 몇 개의 스페이스 콜로니라는 공간을 달과 지구 사이에 설정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지구에도, 달에도, 스페이스 콜로니에도 사람이 사는 시대…. 이것은 지구 위 여러 나라에 여러 민족이 나눠져 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다.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입장의 차이, 세력 다툼, 전쟁…. '건담'의 이야기는 그렇게 발전시킨 거다. 시공간을 잘 마련해 놓으면 캐릭터와 이야기는 일정 부분 스스로 만들어진다. 나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오로지 로켓과 우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만화보다는 소설을 많이 읽었다. 철들면서 접한 SF 애니메이션과 영화들은 대부분 나를 화나게 했다. '왜 저렇게 허술할까' 싶었다. 어린 시절 인기리에 방영됐던 괴수 특수촬영 TV 시리즈 '고지라'도 그랬다. 괴수가 나오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이야기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건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그건 기술적으로도 날림에 가까웠다. 연출자가 '할 수 없었던 디테일'과 '하지 않은 디테일'의 차이를 시청자는 알아본다. 그 배경에는 '애들이 보는 거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이 있었을 거다. 관건은 그림이 아니다. 이야기다. 원반형 우주선이 날아오고 외계인이 나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무성의에 대한 반발심 덕에 미래 어느 시기 지구와 달 사이에 존재할 만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공상할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이 '건담'이다. 내가 진심으로 명작이라 인정하는 SF영화는 오직 하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는 정말 싫어한다. 그건 그야말로 그냥 어린이용 영화다. 애니메이션은 이제 '특별한 장르'가 아니다. 건담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시장과 작업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치열함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실무자나 제작자나 모두 시야가 좁아졌다. 이것이 요즘 누구나 오래 보고 만족스럽게 즐길만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라고 본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창작이 아니라 샘플의 '복제'에 가깝다. 지금까지 나왔던 좋은 작품들을 잘 편집해서 매끄럽게 재가공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크리에이터'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많다.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의 판타지 작가들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네요.
기사전문
http://news.donga.com/3/all/20100717/29948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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