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년간 TV를 전혀 보지 않으며 살고 있다.
'로망스'니 '인어공주'니 하는 드라마들이 있다는 사실도 인터넷에서 듣고 겨우 알 정도다.
그러니 요즘 '뜨는' 가수며 탤런트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하고,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도 모를 수밖에.
뭐, 어차피 난 요즘 노래들은 통 성에 안 찬다.
그 중에서도 특히 힙합 뮤직은 영 싫다.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음악뿐 아니라 패션도 힙합 패션은 내 마음에는 영 들지 않는다.
여전히 팔등신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허리선을 아래로 낮추는 패션이 인기를 끄는 까닭이 뭔지 모르겠다.
그런 옷을 입고 이어폰에서 들리는 힙합 리듬에 맞춰 그 장르 특유의 제스처인 퍽큐 사인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영락없는 뒷골목 양아치들 같다.
이런 내가 사실 나도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대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힙합 뮤직이란 걸 좋아해 보려고 조금은 노력을 기울여 보았다.
그래 봤자 나오는 음악을 일부러 끄지는 않고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려 보는 정도였지만.
헛수고였다.
그 장르는 난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야 기분이 아주 다운되었을 때는 그럭저럭 들을 만할 때도 있긴 있다.
가뜩이나 기분이 처져 있는데 가지 말라느니, 나를 버린 것을 이해한다느니, 돌아갈 테니 용서해 달라느니 하는 발라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더 힘이 빠진다.
무척추동물이나 입밖에 낼 수 있을 듯한 그런 달짝지근한 소리들을 질리지도 않고 늘어놓는 발라드보다는 차라리 힙합이 그럴 땐 낫다 싶다.
'그렇지, 화끈하고 쿨한 맛은 있지, 힙합에. 아마 그것이 힙합의 미덕이겠지.'
그러나 그것도 정도 문제지, 화끈하다 못해 폭력적이고 쿨하다 못해 살벌한 힙합의 정서를 내 감성은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못마땅한 현실에 대해 적개심만 왕성하고 정작 개혁의지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저 날카로운 요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철사줄 같은 신경이 필요할 터이다.
같은 '시끄러운 음악'이라도 록이나 헤비 메탈은 좀 낫다.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록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조금씩 의식이 몽롱해지며 차라리 기분 좋은 최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힙합의 경우, 기관단총을 쏘듯 퍼부어 대는 래핑 때문에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된 래핑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튼 저기 누군가가 나를 향해 뭔가를 놓고 집요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의식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똑같이 강도 높은 사회성 메시지를 발신하더라도 록음악은 순진한 맛이 있다.
그 순진성이 더러 파괴적인 경향을 띠는 경우에도 그 바탕에 흐르는 우직함 때문에 일단 공감이 간다.
그러나 랩뮤직의 메시지는 신랄한 조롱으로만 여겨진다.
말하자면 록이 '이게 뭡니까? 지금 당신들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정면으로 진지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데 비해 힙합은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서 '헤이, 꼰대들!' 하고 빈정거리는 느낌이랄까.
이렇듯 매사를 애시당초 기성세대 입장에 서서 받아들이게 된 현상이 내 나이를 말해 주는 셈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힙합을 좋아해 보려는 노력을 일단 포기하였다.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좋아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 말이다.
나이 먹은 것만도 억울한데 젊은이들에게 아첨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ㅡ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이 자기 취향에 맞는 것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젠 스타일이라던가? 최대한 장식을 배제하고 심플하게 나가는 인테리어 스타일. 그 정결하다 못해 살균적인 느낌마저 주는 스타일을 내 방에 도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차분한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나도 이해할 수는 있었었다.(사실은, 밥먹고 배설하고 씻고 하는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생활의 과정들을 남들과 똑같이 치르면서도 그런 무균질의 상태를 내내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마저 느낀다.)
분명한 것은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이 더 많은 인생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이다.
힙합은 나한테 맞지 않지만 그래도 좋아해 보려는 노력은 계속하는 편이 나을 성싶다.
꼭 그래야 할 의무가 내게 있어서가 아니라 내 감각이 싱싱해졌으면 해서, 젊은 세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갖추고 살아가고 싶어서다.
한 번뿐인 내 삶을 위해서 내게 맞지 않는 것들도 최대한 수용해 가며 살아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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