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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섬'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
13.08.30 11:12
조회
1,812
내가 아직 팔팔한 이십대 중반이었을 때, 새로 나온 남성 잡지에서 서울의 어떤 카페를 소개하는 탐방기사를 읽고 호기심이 생긴 적이 있다.
'섬'이라는 간판을 단 그 카페는 마치 60년대의 지방 도시, 그것도 변두리에 있는 한산한 다방과도 같은 후줄그레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의 묘한 문체라니....
뭐라고 했더라?
섬에는 추절추절 장마가 계속되고 있고, 암캐 한 마리가 그 섬을 지키고 있고, 어쩌고 저쩌고....
궁상스러움, 청승스러움, 처연함....
내가 좋아하던 코드였다.

그 기사를 읽고 나서 아마 1,2년이 지났을 때 한 일 주일쯤 서울에 머무를 일이 생겼었다.
그 무렵 여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여동생이 나를 위해 하룻밤 서울 관광 가이드를 자원하고 나섰다.
어디를 구경하고 싶냐는 여동생의 말에 나는 단박 그 카페 이름을 떠올렸다.
무슨 고가도로 바로 옆이라는 카페 소재지 정보도 함께 대면서.
남산 아랫자락을 휘감아 도는 그 고가도로 이름이 삼일 고가도로던가....?
아무튼 '섬'은 그곳에 있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아마 카페로서는 한창 피크 타임이지 싶은데도 실내는 텅텅 비어 있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던, 아닌게아니라 청승스러워 보이던 잡지 사진과는 달리 거의 보이쉬한 느낌의 쇼트커트를 한 30대 여인이 여동생과 나를 맞았다.
바로 그녀가 '암캐'인 듯하였다.

그곳의 실내장식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돈을 별로 안 들인 집이었다.
싸구려 식탁, 싸구려 의자, 싸구려 선반, 그리고 그 선반에는 등이 벗겨진 책들이 뒤죽박죽으로 꽂혀 있었던가....?
아, 카페 한가운데 무쇠로 된 연탄 난로가 하나 있었던 것도 같다.
인상적인 것은 시커먼 맨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카페 바닥이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거의 보기 힘든 맨흙을 서울 한복판에서 보게 되다니.
잡지 기사의 야릇한 문체에 호기심을 느끼긴 했어도 이런 기괴한 분위기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어쩐지 주눅이 든 우리에게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한 암캐가 다가와서 메뉴판을 건네고는 자기가 앉아 있던 탁자로 돌아갔다.
그래 봤자 좁은 가게에서는 팔만 길게 뻗으면 어깨가 닿을 거리였지만.
여동생과 나는 마치 숲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벙 떠 있는 것을 암캐도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리에 다리를 포개어 앉아, 손님이니 뭐니 하는 부르조아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이 철저히 자유롭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말겠다는 듯 우리가 있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음악에 맞추어 과자를 먹으며 발목을 까닥까닥거렸다.
  ㅡ우리집에서 세련된 손님 접대를 기대하니? 꿈 깨.
그러다가 갑자기 종이곽을 확 구기더니 휴지통을 향해 집어던졌다.
휴지는 빗나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다시 줍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흙냄새가 훅 끼쳐 오는 바닥 여기저기에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구겨진 휴지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커피를 마실 때쯤 돼서는 종아리가 근질거리기 시작하였다.
벼룩이 있는 모양이었다.

커피를 마시자마자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밤거리에 서서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독특하긴 했다, 그치?"

Comment ' 12

  • 작성자
    Lv.61 정주(丁柱)
    작성일
    13.08.30 11:22
    No. 1

    문체와 분위기... 그리고 써놓으신 것으로부터 추정컨데...
    매우... 과거의 분이시고 문채와 분위기 사상도 약간은 과거의 분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글 잘쓰시는 것 같아요.
    경험이 제대로 녹아있달까요?
    흡사 어릴 때 국어책에서 공부하던 단편 현대소설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30 11:38
    No. 2

    나이가 꽤 많은 편인 건 맞습니다만, 생각이나 감성은 젊은 사람들못지않게 파릇파릇하다고 자부한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1 정주(丁柱)
    작성일
    13.08.30 13:41
    No. 3

    히히...
    그런데 약간 문채가...
    마음과는 다르게 조금 올드...
    ... 물론 저는 좋아하지만...
    감성은 물론 젊은 시절의 복합적인 감성을 아직도 유지하고 표현하시는 것으로 보아 젊으시다고 생각합니다. 글 속에 뭔가 과도기적 혼재현상같은 젊은 시절에만 묻어나오는 감성들이 보여서 말이죠. 그냥... 글이 근데 과거 해방 전/후(약2~30년)에 유행하던 현대소설의 스타일 같아서... 약간 올드하다고 한건데... 음...
    뭐랄까 최근의 젊은 사람들은 깊은 사색을 잘 안합니다. 물론 할 사람은 다 하고 겪고 방황하고 하지만 조금은 그 과도기를 빠르게 넘기려 한달까? 회피하던가 부디치던가... 그런게 예전 사람들보단 조금 빠른경향이...
    ...
    죄, 죄송합니다. 흐흐...
    그냥 연배가 지긋하신 문체... 아 이렇게 하면 할 수록 계속 나이드셧다고 하는 것 같아서 상처받을까봐 뭐라고 해야할지... 그냥 예전 소설에서 자주 보던 문채라는 생각이 드는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정말 잘쓰시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30 14:16
    No. 4

    문제의 잡지 기사의 문체에 얼마 정도 영향을 받은 탓에 제 이 글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백수마적
    작성일
    13.08.30 11:58
    No. 5

    영화 '섬' 인줄 알았는데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30 14:08
    No. 6

    '섬'이 아마 김기덕 영화였던가....? 김기덕 영화는 왠지 거부감이 들어서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답니다. 사람 몸을 바늘로 찌르고 어쩌고.... 얘기만 들어도 무서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페르딕스
    작성일
    13.08.30 12:46
    No. 7

    문학에서 자신이 증오하거나 어떤 관계가 있는 타인에게 암캐라고 칭하는게 잘못되거나 비난해야 할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글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단어로 사용했네요.
    다른 글에서 본 글을 옮겼다고 해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30 14:13
    No. 8

    문제의 잡지 기사에서 암캐란 말은 상대를 비하하는 의도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답니다. 도시적인 허식을 말끔히 벗어 던지고 여성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간직한 존재.... 뭐, 그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1 정주(丁柱)
    작성일
    13.08.30 14:23
    No. 9

    자, 일단 글의 소개가 60년대 기사...
    물론 여성 비하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과거의 일임에도 과거 당시점의 현대에서도 동떨어진듯한 뭔가 자연적이고 대충 만든듯한 다방, 그리고 그 다방의 마담의 별명이 암캐...
    여자를 암캐라고 한다면 뭔가 색정적이고 비하적으로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표현한 암캐는 흡사 예전에 보던 어떤 소설에 사람을 늙은 개에 비유하거나...
    여하튼 여자라 암, 그리고 사람이 오면 나가보고 가끔은 짓기도(상대도) 하면서 자유롭게 있기에 개? 해서 암캐라고...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잡지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고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니까 암캐라는 표현을 사용했겠지만, 매우 시적이고 비유적, 함축적인 표현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최근의 직설적이고 초 색정적인 기사에 비하면 정말 잘 쓴 기사...
    그리고 그걸 그대로 옮김으로서 그때의 기분을 살리기 위해 쓰신 글...
    전 바람직하게 잘 쓰셧다고 봅니다.

    암캐라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개라는 동물의 속성에 집중하십시오.
    사람이 오면 반갑다고 핵핵거리기도 하고, 혹은 무심한 눈으로 집을 지키며 한번 처다보고 늘어저 있다던가... 그냥 그런 성질의 여성이기에 암캐라는 표현을 한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0 자견(自遣)
    작성일
    13.08.30 12:54
    No. 10

    글을 읽다 보니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생각나네요, 아비정전 이라든가.., 좋은 글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30 14:14
    No. 11

    아, 아비정전, 너무 좋아하는 영화랍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1 정주(丁柱)
    작성일
    13.08.30 14:24
    No. 12

    우... 검색해보니 1990년도에 15세 영화...
    내가 그때...
    1학년 이었으니...
    ... 와웅. 최근 영환지 알았는데 나중에 기회되면 꼭 봐야겟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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