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역시 빌어먹도록 나쁜 놈인가 봅니다.
S와 사귀게 된 지 일 주일 남짓이 겨우 지났지만 정말 난국이 끊이질 않네요.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인 상황입니다.
주초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하트 뿅뿅 해서 카톡 쏴주고(S도 쏴주고), 방학 막바지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들러붙어서 놀고...... 여자애랑 이렇게 친밀하게 얘기한 경험이 없어 좀 어렵긴 했는데, S가 워낙 활발한 아이라 그런지 분위기를 좋게 이끌어주더군요.
아무튼 그래도 S랑 같이 놀다보니까 '아,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좋긴 하더군요. 같이 쇼핑하고 다니는데, 평소에 듣던 것보다 별로 힘들지는 않습디다. 의외로 마초 이미지를 추구하는 제게도 소녀적인 감수성이 숨어 있었는지, 함께 아기자기한 물건들 살펴보면서 이게 예쁘네, 저게 귀엽네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지요.
그래서 개강일 아침까지, 딱 학교에 도착해서 첫 수업에 임할 때까지 기분이 꽤 해피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내면 S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첫 수업을 마치고 빨빨거리면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는데....
Y랑 딱 마주쳤습니다. ^^
저는 멍하니 가고 있었는데 Y가 먼저 부르더군요. -_-;;
솔직히 몹시 당황했습니다.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더군요. 얼떨결에 반갑게 인사해주기는 했는데 머릿속으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근데 그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게 있었지요.
얘가 저한테 반말을 합디다. ㅡㅡ;;
참고로 Y는 11학번입니다. -_-; 현역으로 들어왔으니 나이차는 1년쯤 됩니다. 그리고 저는 Y더러 저한테 말 편하게 하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근데 갑자기 "어디 가?" 하면서 묻는데, 처음에는 얘가 말실수로 '-요’를 빼먹었나 싶어서 그냥 자연스럽게 자료실 간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 "호오~ 수업 끝났어?" -_-;;
순간, '얘가 미쳤나?' 싶으면서도 뭐라 태클 걸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에 아직 하나 남았다고 했더니, 뭐 적당히 방학 동안의 안부를 묻고 답하고는 나중에 동아리방에서 보자며 인사하고 떠나더군요. 물론 끝까지 반말이었습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다 받아주기는 했지만, 곱씹어보니 방학 초까지는 저를 좀 멀리하는 듯 보였던 애가 갑자기 반말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요. 한 번 Y의 맞은편에서 식사하게 되었을 때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 때 자기한테 쫄아서 그러는 줄 알고 저를 만만하게 보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디다. -_-;;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기랄, 솔직히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더군요. 다음 수업 받고 있는 동안에도 진정이 안 됩디다. 에어컨 다 틀어놓은 강의실에서 혼자 땀 흘리면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으니 그 꼴이 가관이었지요. S랑 사귀고 나서부터 정담 분들을 포함해 주변으로부터 숱하게 받은 조언이 'Y는 잊어라.'였고, 저도 확실히 Y는 잊어버린 채 S에게 집중하자고 결정했지만...
막상 만나니까 도저히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덕분에 교수가 강의 계획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었는데 하나도 못 들어서 결국 다른 분반에서 수업 받는 친구에게 구걸 크리. -_-;;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귀갓길까지 같이하게 되었지요. 제기랄! 저번 학기 말에는 그렇게나 같이 가고 싶었는데도 죄다 실패 크리를 먹었건만, 지금은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에 집까지 같이 가게 되다니! ㅜㅜ S가 발표회 연습 때문에 학교에 못 온 관계로 혼자 버스정류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관람하며 서 있는데, Y가 등 뒤로 와서 툭 치더군요. -_-;;
그래서 또 얼떨결에 같이 버스에 타서 얘기를 나누었지요. 가족여행 갔던 일에 대해서라든가...토익 학원 다니느라 방학 중의 동아리 행사에 하나도 참가하지 못해 아쉬웠다든가... 들으면서도 동시에 '나 피하느라 안 나온 게 아니었구나. ㅜㅜ’ 하며 안심하는 저 자신이 참 싫어지더군요. -_-;;
근데 얘가 계속 반말을 하기에 버스에서 내내 지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지하철로 갈아탔는데... 또 빌어먹을 건수가 터졌어요. ㅜㅜ 딱, 역에 도착하니까 지하철이 오더군요.
그러자 걔가 제 손을 낚아채고는 열차 왔다며 이끌고 달리는데....
제기랄. 솔직히 지금 쓰기 전까지 계속 부정하고 있었습니다만, 새삼 되새겨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번 주일에 S가 제 손을 잡았을 때 심장이 두근두근했다면...
이번에 Y가 제 손을 잡으니까 아주 심장이 쿵쾅쿵쾅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빌어먹을! 저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요!!
게다가 딱 들어가니까 자리가 있어! 있다고요! 왜 자리가 있는 거야, 제기랄!! 차라리 하나만 있어서 걔만 앉힐 수 있게 하든가!!! 평소에는 빌어먹게도 없던 자리가 왜 이번에는 두 사람이 넉넉히 앉을 만큼 있냐고, 빌어먹을!!!
....둘이 같이 앉았습니다. 제 옆에 Y, Y 옆에 저. ^^
아, 물론 여자애들이랑 같이 어디 가다보면 옆자리에 앉을 일이야 많이 있죠. 솔직히 옆자리에 앉는 것 갖고 신경 쓰이네 마네 하는 건 무슨 이슬람 국가에서 살다온 애도 아니고, 오버이긴 하죠. ^^
근데 바로 옆에 앉아서 재잘재잘 떠드는데, 내쉬는 숨결이 바로 제 뺨에 닿더군요.
....반말하는 거 지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Y가 뭐라고 떠드는 것도 잊었어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Y도 제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건 눈치 챘을 거예요. 솔직히 그 동안 제가 Y 앞에서 자연스럽게 처신하지 못한 거, 주변 사람들 중에 알아채지 못한 이가 없으니 Y 본인도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방학 중에 저한테 좀 냉랭하게 대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러다 보니 S랑 사귀면서 Y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했어요. 어차피 절 피하는 애인데, 제가 이미 S한테 관심사를 돌려버렸으면 걍 끝~. 그냥 편하게 오빠 동생으로 지낼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근데 또 이제 와서 갑자기 친근하게 굴어대니 모르겠네요. 돌연 말 놓는 것도 제기랄...여자애가 저를 만만하게 봐서 그랬을 리는 없고 친밀하게 구는 거겠죠.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Y가 저한테 친하게 구는 것은 그냥 1학기 때와 다름없이 대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2학기도 되었으니 그냥 편하게 말 놓는 것일 테고. 저한테 냉랭하게 대하네 마네 하는 건 그냥 제가 오버해서 착각한 거고....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Y가 절 피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니까요.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럽군요. 스스로 결정내린 것도 지키지 못하는 제 자신에 대한 신뢰가 꺾인데다가 이런 상태로 Y를 어떻게 대할지도 모르겠고... 당장 Y랑 시간표 겹치는 게 두 개나 있는데 ㅜㅜ
Y랑 S랑 친해서 학교 안에서도 같이 돌아다닌단 말입니다. 절대 S 앞에서 Y랑 같이 만나면 안 돼요. S는 제가 Y 좋아한다는 건 모르지만, 그래도 Y 앞에서 제가 안절부절못하면 단박에 눈치 챌 거 아닙니까.
어제는 S랑 같이 등하교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 끼고 재잘거리는데, 진짜 죄책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증가열매 ㅡㅡ;;;
젠장... ㅜ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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