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다들 노력이 화두인 것 같습니다.
방송을 봐도 유명 인사들이 나와서 노력론에 대해 말하고, 온라인에서도 그렇고.
어딜 가나 요즘 노력론이 화두이고 뜨거운 논쟁 거리인데 정작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한번 이 문제에 대해 고찰을 해봅니다. 이하 편의를 위해 반말로 쓰니 그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1. 왜 자꾸 노력론이 젊은 세대에게 강요되는가?
결국 노력론은 애초의 취지인 ‘성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성공학의 범주에서 벗어나 권력이 그 안에 숨어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문제가 커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권력이 피지배층에게 잘 써먹는 통치 논리 중 하나가 바로 아래로의 책임전가다.
노력론은 오류 투성이로 가득찬 성공학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문제지만 결론적으로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위에서 지지 않고 아래로 전가하려는 권력의 작용이 더 문제다.
한국의 가장 원초적인 조직인 국가, 회사, 가정의 수장들, 즉 정치인, 자본가, 아버지라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노력론을 외친다.
정치인이 국가 정책의 실패를 국민이 나태하고 해이해져서라고 말한다.
자본가 역시 회사의 실적 부진을 직원의 게으름과 낮은 생산성에서 찾는다.
아버지 역시 막대한 학원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낮은 성적을 자식의 게으름, 나태함 등에서 찾는다.
정치적 비전과 국내외 정세를 통찰하지 못한 정치인으로의 저질적인 안목, 회사의 대표로서 회사의 빠르고 간결하며 합리적인 시스템 구축의 실패, 자녀의 적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축구 잘하는 자식에게 판검사 되라고 학원 보내는 아버지의 탐욕.
이러한 윗선에서의 실패를 모두 한방에 날려버리는 것이 아랫것들(국민, 직원, 자식)이 노력을 안해서 그렇다고 외치는 것이다.
위에 계신 분이 이렇게 외치는 순간 아랫것들은 감히 윗분들께 ‘너한테 책임이 있잖아’라고 묻기 어렵다. 한국처럼 수직적인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권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결국 실패에 대한 책임을 위에서 지지 않고 아래로 전가시키는 것이며, 그 안에는 ‘권력’이라는 것이 작용하고 있다.
노력론의 일차적 문제는 여기에 있다.
2. 노력론은 한국판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한다.
인도에는 지금도 카스트 제도가 존재한다.
카스트 제도의 핵심은 4성 계급이며, 전생에 쌓은 선행에 따라 현생의 복락이 정해진다는 논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카스트 제도야말로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에 매우 부합하는 제도다.
전생에 착한 일 많이 하면 현생에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이건 그냥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이다.
힌두교와 불교에서의 전생의 논리는 때론 이렇게 계급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왕권이 강화될 무렵 어김없이 불교가 도입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왕인 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니까 너네들 함부로 개기지 말아라.
이렇게 전생의 인과응보 논리는 때론 권력자에게 너무 달콤한 지배자의 논리가 된다.
일종의 불교-힌두표판 왕권신수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왕권신수설 및 카스트 제도가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노력론을 통해 재창조되고 있다.
내가 사장이 되어서 돈 많이 번 건 내가 노력해서고, 너가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최저임금 받으면서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건 너가 노력을 안해서다.
내가 브라만, 크샤트리아로 태어나 모든 거 다 누리고 사는 건 내가 전생에 착한 일 많이해서고, 너가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건 너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다.
인도 카스트 제도의 근거가 되는 전생론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력론이다.
더 문제인 것은 역사적으로 카스트 제도와 같은 논리들엔 매우 깊은 폭력성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전생론이 사실로서 법칙으로 인정되는 순간 모든 인간은 그 법칙에 순응해야 하고 여기서 일탈하는 자는 어떤 식으로든 폭력에 노출되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노력론 역시 법칙으로 이미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자연히 폭력성 역시 띄고 있다.
그리고 폭력은 당연히 권력이 되며, 권력의 속성에 따라 아래에서 위가 아닌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게 된다.
안 그래도 유교적인 경직성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을 더욱 경직되고 폭력적으로 만든다.
2030 젊은이들이 현재 이 폭력에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이는 더욱 심각한 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3. 노력론을 외치는 사람은 사실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다.
애초에 노력론이라는 것 자체가 오류로 시작해 오류로 끝나는 성공학이다.
성공의 요인에는 무사하게 많은 변수들이 작용하며, 그 성공에 있어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로는 매우 미미하다.
재능, 기연, 적성, 흥미 등등의 무수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공학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철학, 역사, 문학, 심리학, 뇌과학, 진화론, 사회학 등등의 모든 학문을 다 아울러야 겨우 가능할까 말까하다.
뉴턴이 아무리 천재라고해도 동시대의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땅이 물체를 잡아당긴다는 요사한 낭설을 퍼뜨리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양준혁이 아무리 야구를 잘하고 야구를 위해 노력을 했어도 아무런 스포츠의 기반이 없던 한국의 50년대에 살았더라면 그는 전통시장에서 막일로 먹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반도 필요하고, 문화, 풍토, 역사, 지리 등등의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너가 노력하지 않아서 너는 실패했고, 나는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사회, 문화, 역사, 지리, 시스템, 구조 등을 통찰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자 지성과 지식이 뒤떨어지며,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성공에 따르는 복잡한 요인들을 탐구할 지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단순무식하게 ‘노력’이라는 거 하나로 다 퉁친다는 뜻이다.
이것은 여기 문피아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작가들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만 해도 정당한 댓가를 받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썼지만 책대여점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모든 노력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이제와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유료연재, 전자책 등이 활성화되면서 작가들의 수입이 크게 늘어났다.
옛날엔 작가들이 노력을 안해서 수입이 적었고, 지금은 작가들이 노력을 많이 해서 수입이 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장르문학의 역사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놀림을 당할 것이다.
작가들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본인의 노력이 아니라(그렇다고 작가가 노력을 안한다는 뜻은 아니니 이점은 오해하지 말자), 바로 스티브 잡스일 것이다.
따라서 너는 노력 안해서 그 모양 그 꼴로 살지만, 나는 노력해서 잘 산다고 외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신의 성공이 왜 가능했는지 따져볼 최소한의 지적 능력도 갖추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지적 능력을 갖추려는 노력을 안하겠다고 스스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이다.
노력론을 외치는 자야말로 사실은 가장 노력을 안하는 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노력론은 ‘나 혼자 다 했다’ 라는 탐욕의 결과물.
간혹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해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해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살만하게 산다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도 있다.
일종의 자수성가 신화다.
한국은 6.25로 초토화된 상태에서 모두가 다 비슷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해 경제개발에 성공하다보니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꽤 나왔고, 그 영향으로 자수성가에 대한 지나친 찬양의 분위기 또한 존재하는 듯하다.
또한 자본가 계급에 대한 배타심에서인지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가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시기의 대상이며, 또한 무시의 대상도 되는 듯하다.
특히 밑바닥에서 굴러봐야 한다는 밑바닥 체험은 자수성가 신화와 매우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나오는 영화는 꼭 세자 시절의 세종대왕을 밑바닥에서 한번 굴려봐야 하고, 최근엔 광해군도 밑바닥에서 구르게 하는 영화가 나온 적이 있다.
설사 재벌2세, 3세라도 밑바닥 체험을 시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한국인이 아닐까 한다.
이 밑바닥 정서가 나쁜 것은 아니겠으나 결론적으로 밑바닥 체험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나 혼자 다 했다’라는 자기 과잉 의식을 갖기 쉽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성공에는 여러 사회적 요인, 문화적 요인, 역사적 요인 등등이 다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다.
짜장면 배달부로 성공한 것도 7,80년대 당시 농경 사회에서 급격하게 산업화 사회로 이행하면서 외식 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밑바닥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요인을 통찰할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공에 대한 자기 과잉 의식까지 겹쳐져 이 모든 걸 ‘나 혼자 다 했다’라고 착각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 혼자 이걸 다 했으니까 성공의 결실도 모두 다 내 것이고, 나 혼자 다 했고 남은 못했으니까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왜곡된 인식이 저절로 자라나게 된다.
이들이 결론적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훈계를 하는 폭력성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문제가 된다.
탐욕과 폭력이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고, 그것이 자꾸 표출되기 때문에 아직 자본축적을 이루지 못한 젊은 세대인 2030세대가 속수무책으로 이것에 당하면서 사회 갈등이 촉발된다.
5. 지금의 20대가 50년대보다 더 힘든가?
이 질문은 얼마전에도 올라온 주제이다.
여기서 다 대답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만은 확실하지 않을까 한다.
만약 50년대에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가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을 안한다고 질책하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해서 일본놈들한테 패망해서 식민지로 살았소>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해서 아프리카보다도 못 사는 나라를 만들었소>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해서 북한군한테 부산까지 밀렸다가 겨우 미군 도움으로 서울 수복하고, 그 마저도 또 중공군한테 밀렸소>
그래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가난은 했을지 몰라도 기성세대들에게 욕은 안 들었을 것 같다.
6. 노력론을 적용하면 제일 욕 먹어야 할 사람은 2030세대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 조상들이 뭐 그렇게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은 없다.
노력론으로 따지면 고구려도 결국 당나라에 멸망을 당했으니 노력이 부족한 것이고.
백제도 나당연합군에 그렇게 망했으니 노력이 부족했고.
고려도 몽골에 그렇게 털려서 후손들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크게 찍히게 만드셨으니 노력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임진왜란에 병자호란까지 오랑캐에도 수도 없이 털리셨으니 또 노력이 부족하신 듯하고.
따지고보면 우리 조상님들처럼 노력이 부족한 분들도 찾기 힘든 것 같다. 맨날 외세 오랑캐 남자들에게 털리고 털리고 또 털리고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게 우리 조상님들 현실인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다만 후손의 얼굴에 흙을 뿌리면 그것이 결국엔 조상의 얼굴로 되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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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몇 년 간 한국사회에서 논쟁을 뜨겁게 부르는 주제인 노력론에 대해 조금 고찰을 해봤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더욱 많지만 일단 이 정도로만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력이란 거는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 것이고, 사실은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나라에 털리고, 몽골에 털리고, 왜놈에게 털리고, 청나라에 털린 우리 조상들에게 노력이 부족했다고 외국사람이 말하면 다들 사생결단낼 듯이 달려들 겁니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남도 듣기 싫다는 공자님의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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