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이다.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골짜기 사이에 흩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의 6부였다. 고허촌장인 소벌공이 양산 밑 나정이라는 우물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 곳에 가서 보았더니 말은 오간 데 없고 다만 있는 것은 큰 알뿐이었다. 알을 깨어보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했기 때문에 높이 받들어 모셨다.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처음 큰 알이 박과 같다 하여 박(朴)으로써 성을 삼았다. 거서간은 진인의 말에 왕이란 뜻이다.
배가 진한의 아진포구에 이르니,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 지 39년 되던 해였다. 그때 해변의 노모가 이를 줄로 잡아당겨 바닷가에 매고 궤를 열어보니 거기에 한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노모가 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자라서는 키가 9척이나 되었고 인물도 빼어날 뿐 아니라 지식 또한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을 알지 못하니 처음 궤짝이 와 닿을 때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짖으며 따라 다녔으니 까치를 뜻하는 글자(鵲)의 한 쪽을 줄여서 석씨로 성을 삼고, 또 그 아이가 담긴 궤를 풀고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으리라"고 하였다.
탈해니사금 9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편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새벽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나뭇가지에 금색의 작은 궤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조그만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그 외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냐?"하고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서 이름을 알지(謁知)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하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여 국호로 삼았다.
<해설>
신라의 건국신화. 난생설화(卵生說話)의 하나이다. 박혁거세가 모든 박씨(朴氏)의 유일 시조(始祖)이므로 창건시조 신화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탄생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라가 형성되기 이전 진한(辰韓) 땅에는 부족사회 사로육촌(斯盧六村)이 있었다. 하루는 촌장들이 알천(閼川;경주지방의 하천)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君長) 추대를 의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때 갑자기 나정(蘿井)의 숲 사이에 서기(瑞氣)가 뻗치더니 용마(龍馬) 한 필이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이하게 여겨 그곳으로 몰려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자줏빛의 알 같기도 하고 박(瓢) 같기도 한 것이 있어 깨보았더니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경이롭게 여겨 동천 샘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빛살이 뿜어져 나왔는데 이때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와 같은 연유로 박같이 생긴 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하고, 빛나게〔赫〕 누리〔世〕에 선〔居〕다 하여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한편 같은 날 사량리 알영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삼국사기》에는 오른쪽이라 되어 있음)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으니 입술이 꼭 닭부리와 같았다. 이내 월성의 북천에서 미역을 감기자 입부리가 떨어졌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그녀가 태어난 우물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하였고, 그들 나이 열셋이 되자 각기 왕과 왕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서벌·사라·사로, 더러는 계림국이라고도 하였으나 뒤에 신라로 고쳐서 전하였다.
※출처:고전문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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