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행님의 천사지인은 신무협의 시작은 아니지만
한국만의 신무협의 중흥을 알리는 역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글과는 분위기가 다를 뿐더러
이야기의 방식도 무협의 방식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매력을 어필하는... 어쩌면 새로운 형식의
무협의 장르로서 성공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번뜩이는 지혜와 고강한 무공으로 강호를
주유하는 무협지의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천사지인은 겉으로는 무협의 양식을 따르지만 내용면에서는
무협의 한계를 탈피하려는 시도를 했고, 어느정도는
성공했습니다. 비록 용두사미의 결말 때문에 아쉬움이 남지만,
천사지인의 장염을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도"에 있었고, 장염의 행보를 통해 한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구도소설의 형식을 잘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탈속함을 추구하는 특유의 구도소설의 분위기는 새로운
무협독자를 끌여 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뒤이어 책으로 나온 칠정검 칠살도는 그런 분위기에서 한 발
물러서서 다분히 기존의 무협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죠.
주인공이 검선의 후계자이고 최종보스도 신선이어서
도가의 명구가 자주 나오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상당히
완성도가 있는 무협소설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선천적인 기형이라는 점도 특징이었죠.
아무튼 조진행이라는 이름을 당당한 작가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업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공백을 깨고 나온 기문둔갑은 어땠을까요?
기문둔갑은 다시 천사지인으로 돌아갔습니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도"를 추구하는 한, 그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재로 삼은 기문둔갑의 부적술과 진법은
그 성격이 애매모호합니다. 무협이니만큼 기문둔갑의 성격도
다분히 무공과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또한 무공보다
어려운 천지의 운행의 이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그 위력이
뛰어남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문둔갑이 무공보다
뛰어나서는 그것을 '무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기문둔갑은 신선의 술수입니다. 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죠. 허나 기문둔갑에 나오는 최고의 절대자들은
모두 기환술과 부적술의 대가들입니다. 무림인들이 설 입지자가
매우 좁습니다. 기문진법이나 기환술을 익히는 자는 무사나
협사가 아닌 술사나 방사일 뿐입니다.
천사지인이 도가의 심법에 바탕을 둔 무공의
연성을 통해 도통을 추구했다면, 기문둔갑은 술법을 통한
득도를 추구합니다. 작가님은 이를 통해 전작인 천사지인과의
차별화를 꾀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실망이었던 점은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1~2권의 흐름은 완결을 기대할 정도로
출중했습니다. 내심 조진행님의 발전에 쾌재를 토했었죠.
헌데 3권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정사대전 이후의 전개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무리 글의 중심이 주인공인
왕소단의 인간적인 완성에 있다고 하지만, 무협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긴장감이 사라지고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로
빠져들게 된 건 실망이었습니다. 정사대전 때 이미 초극고수가
된 주인공인지라 그 이후의 행로에 긴장감이 없음은 물론이고
과연 그 이후의 전개가 꼭 필요한 것들이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주인공의 성장과 시련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매우
부족한 느낌입니다. 천사지인에서 험난한 강호의 시련과
일족의 몰살이라는 비극을 통해서 성장한 장염과는 좀 비교되는
측면이 있는데... 왕소단의 비극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돌아오면 김빠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어느순간부터는 왕소단인지 장염인지 구분이 안가게 됩니다.
왕소단은 이기적이고도 비상한 머리를 지닌 문사이지만
초반에만 그런 개성이 나타나고 후반에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합니다. 우유부단한 모습은 꼭 예전의
장염과 같습니다. 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몰개성이 되는 것이
아닌 데... 작가님이 도적 표현에 너무 신경을 쓰시느라고
주인공의 개성을 죽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눈으로 볼 때 작가님이 도를 바라보는 안목 또한
천사지인 때와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괜히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때는 글이 중언부언 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천사지인 때도 그러더니만 기문둔갑도 마찬가지...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지 않고 지극한 회의를 통해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 도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유뷰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왕소단은 '쓸데없이' 번뇌합니다.
이는 분명 왕소단의 성격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번뇌한다는
말은 이전의 번뇌와 이후의 번뇌가 같다는 뜻입니다.
수준이 높아진다면 같은 내용의 번뇌라도 양상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현학적인 대화와 깨달음 뒤에
다시 '같은' 수준의 번뇌를 반복하는 왕소단에게
우유부단하다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작가의 도학의 수준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할 경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고보니 작품의 중심이 지나치게 추상적인 도적 완성으로
빠져들다 보니 현실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부족한
것도 작품의 분위기를 허공에 뜨게 하는 원인인 듯 싶습니다.
천사지인에서 변신을 추구했지만... 결국 천사지인과
같은 선에 멈추게 된 것이 기문둔갑입니다.
조진행님이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심을
줄이든가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수밖엔 없어 보입니다.
매우 아쉬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단점만 적었지만 장점도 큰 소설이죠.
무협과 구도소설의 짱뽐이란 것은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구도소설이란 것이 아무나 쓸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만한 식견으로 무협을 쓸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조진행님이나 청룡장의 이재용님이 아니라면
거의 대다수의 글들이 일정수준 밑인 걸 감안하면 말입니다.
* 무판돌쇠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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