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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성, 보편성, 훌륭한 예술
훌륭한 예술은 사회와 관습을 앞서나가고 기존의 인식과 통념과 감수성의 지평을 확장하는 예술이다. 심지어 훌륭한 예술은 불순하고 불온해야 한다. 순수하다거나 온전하다는 것은 많은 경우 '관습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는 나쁜 것들', 또는 같은 말이지만 '보편적인 것을 가장한 특수한 나쁜 것들'을 보전하고자 하는 맹목적 지향, 이데올로기적 지향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훌륭한 예술은 일단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것, 더 나아가서는 불가해하거나 불쾌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은 주어져 있는 (편안한) 관습이고 인식이고 감수성이고 통념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예술이 보편성을 지향한다면, 그 보편성은 보편적인 것, 심지어는 자연적인 것을 가장한 '특수한 나쁜것들'을 들쳐내는 과정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진정한' 보편성이다. 이를테면 성애에 대한 어떤 사회적 금기들이 그런 특수한 나쁜것들일 수 있을테고, 따라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나 <로드 무비>같은 영화는 우리에게 성애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경험, 더 보편적인 성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것이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혐오감만을 느끼며 그 경험의 의미를 자기화하지 않거나 그 경험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단, <올드 보이>도 이 경우에 속하는지는, 즉 <올드 보이>의 대중적 성공이 일반적으로 당연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대중이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애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대중성과 '진정한' 보편성을 그 자체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많은 대중들은 보편적인것이라고 통념화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진정하게 보편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만 보편성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환호하는 대중예술작품들일 수록 나쁜 예술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예술작품의 대중성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그 예술작품의 휼륭함이나 보편성(보편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가치를 형상화함)을 증거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흥행이나 판매부수만 따지면 되지 비평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고 대중성이 희박한 순수예술이 일반적으로 대중예술보다 더 고급한 예술이라고 통념화되어 있다는 사회적 사실 또한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2. 대중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는 작품의 가치
질문:
대중의 흐름에 따라가는 않는 예술은 어떤 존재가치가 있는가? 대중 속에 살아 숨쉬지 않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 아닐까?
답변:
여러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꼭 좋은, 혹은 더 좋은 것이라는 법은 없다. 얼핏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것은 드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훌륭한 - 즉 어느정도 수준있는 - 예술 취향을 가진 이들도 드믈 것이고 훌륭한 예술도 드믈 것이다. 반면 그저 그런 예술과 그저 그런 예술취향을 가진 이들은 많을 것이다. '대중'에는 다수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지금까지 한말이 어느정도 맞는 말이라면, 대중이 좋아하는 예술은 그저 그런 예술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고 이 말을 대중이 즐기지 않는 예술일 수록 더 훌륭한 예술이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또한 대중이 즐기는 예술 가운데는 절대 훌륭한 예술이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나는 어떤 모더니즘 미술이나 음악보다 카펜터즈의 노래나 일본의 어떤 만화가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예술이 드믄 이유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예술을 만드는데는 더 큰 재능과 이용하고 자극받을 수 있는 훌륭한 것들의 전통과 창조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사회역사적 조건/상황이 요구 되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그 훌륭한 예술을 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훌륭한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예술일 수록 정교하고 난해하고 복잡한 경향이 있는 반면 그 정교함, 난해함, 복잡함을 이해하고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갖춘 이들은, 아무리 대중교육의 수준이 높은 사회라 하더라도, 갖추지 않은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이 말을 훌륭한 예술은 반드시 정교하고 난해하고 복잡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정교하고 난해하고 복잡한 허접쓰레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3. 대중예술과 상업적 지향
대중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상업성이라기보다는 접근용이성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순수예술보다는 대중예술에 상업적 지향이 더 강하다든가 적어도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위계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이들은 그렇게 본다고 얘기할 수는 있다. 내 자신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위계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순수예술보다는 대중예술에 상업적 지향이 더 강하다는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다. 그러나 '순수한' 대중예술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즉 강한 상업적 지향은 '많은' 대중예술작품들을 특징짓는 것이기는 해도 대중예술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실로 상업적 지향을 전혀 하지 않는 예술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상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 사실은 개개 예술가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회제도적 사실이다. 예술작품을 시장에서 팔지 않고서는 (또는 예술작품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서는) 의식주 해결도 어렵고 예술가로서의 자기를 재생산하기도 어렵고 예술가로 인정받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도'이다. 어떤 정도의 상업적 지향은 창작의 자유라든가 작가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순수한 측면을 과도하게 희생하지 않고도 예술작품의 기획과 제작에 개입할 수 있다. 또한 얼마나 팔릴까를 '거의' 고민하지 않은채 내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 전에 먼저 '내' 작품이어야 한다는 태도로 작업하는 대중예술가들도 있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맘껏' 발휘하면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이 자동적으로 좋은 의미에서의 대중성을 갖게 되고 따라서 강한 상업성 또한 수반하게 된다고 '믿고'작업하는 대중예술가들도 있으며 아예 처음서부터 소수의 매니아층만을 염두에 두고, '소수에게만 팔려도 별 문제없다, 오히려 그게 내 작품의 진정성에 어울린다'고 믿고 작업하는 대중예술가들도 있다. 우리가 흔히 '훌륭하다', 심지어는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대중예술가들, 몇십년의 세월을 거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을 즐기는 그런 대중예술가들은 '거의' 모두 이 범주들에 속한다.
상업적 지향이라는 것은 '지향'이라는 말 때문에 예술가 자신의 의도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오해될 수 있다.그러나 누가 무엇을 의도했느냐 하는 것은 주로 그 의도를 갖고 행해진 행위의 결과를 보고 확인되는 것이지 무엇을 의도했다는 말 자체만으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선물도 안주고 달콤한 말도 안해주고 애뜻하고 뜨거운 눈길도 안주고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법도 없고 내 말을 경청하는 법도 없는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의도가 아니라 특정한 표현적 행위이니까. 마찬가지로 상업적 지향을 하느냐 않하느냐의 문제도 그 예술가의 머리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진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예술가의 의도나 얼마든지 거짓말일 수 있는, 그 의도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속에 얼마나 상업적 요소가 들어있느냐를 따져 확정되어야 한다. 많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중예술작품들에 공통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든가 (대중이, 그 환타지가 일말이라도 갖고 있을 수 있는 나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반성적 거리를 두고 보게끔하는 장치는 전혀 혹은 거의 갖추지 않은 채) 대중들의 환타지를 가상적으로 실현시켜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예술작품은 상업적 지향의 산물이고 상업적 지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뿐이 아니고, 양심적으로 실제로 상업성을 배제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양심적으로 실제로 상업성을 배제했는지 안했는지는 예술가의 양'심'이 아니라 작품에 물어보아야 한다. 물론 작품에 대고 묻는다고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답변이 나올 가능성은 있다. 어떤 요소들이 '상업적 요소'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상업적 요소가 얼마나 있어야 상업적 지향이 강한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어떤 답변이 다른 답변들보다 더 정확한 것일 테고 비평가들 사이에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개입해 있지 않다면 상당한 정도의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4. 접근용이성과 대중예술
어떤 예술작품이 접근용이성을 갖는다는 것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술작품을 즐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혈기왕성한 나이일 때 로맨스물이나 멜러물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었는데,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예술작품은 접근용이성과 기타 몇가지 부수적인 대중예술의 필요조건(상업적 성공이 '제일' 중요한 목표들 가운데 '하나'라든가, 그 예술작품의 최종 모습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거의 배타적인 결정권을 가지는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라는 면과 예술가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면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든가, 전파에 실리거나 대량으로 복제되어 공급되는 등 많은 사람들에 의한 수용이 용이한 형태를 취한다든가, 대중이 사회현실속에서 느끼는 모순이나 불만을 가상적으로 충족시켜주는 환타지를 제공해주는 면이 크다든가 등등) 을 갖춘다면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즐겨지지 않으면서도 대중예술에 속한다. 즉 흥행잠재력이 큰데도 홍보가 미숙했다든가 개봉이나 출시시기를 잘못 맞추었다든가 해서 본전도 못건진 영화도 여전히 대중예술에 속하고, 접근만 용이할 따름이지 대중의 '즐김'까지도 끌어낼 수 있는 요소를 갖추지는 못해서 흥행에 실패한 영화도, 심지어는 시사회만 마치고 개봉을 못한 것은 물론이고 비디오로 출시되지도 않은채 필름 창고로 들어간 영화도 대중예술에 속한다. 모든 대중예술이 성공한 대중예술이기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소수의 매니아만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작품이 대중예술이냐 아니냐는 흥미로운 쟁점이다. 그런 예술작품일 수록 상업적 성공에 대한 지향이 크지 않고 (따라서 자본의 요구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예술가가 마음껏 자신의 의도와 역량을 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번 째로 고려해보아야 할 문제는 접근이 용이한 정도이다. 소수의 매니아만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반드시 소수의 매니아만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와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될 수 있지만 그중 일부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를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소수의 매니아'라는 말도 상대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수의 매니아'라는 말로 작가는 '많아봐야 몇 만명 정도'를 의미할 수도 있을텐데, 순수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몇 만명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엄청난 다수는 아니어도 꽤 다수이고 뜻하지는 않았던 것이라도 상업적인 성공을 보장해줄 정도의 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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