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닥에나 대세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창 유행하는 것,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대세는 일종의 파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뒤에서 밀어주는 파도를 타면 혼자 힘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멀리,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죠.
제가 이런 대세의 힘을 처음 느낀 것은 대충 십여년 전이었습니다.
아는 동생이 서울코믹에 출품을 한다더군요.
동인지는 아니고, 그냥 일러스트 그린 걸 코팅해서 파는... 뭐 사실상 당시 코믹에서 가장 많이 유행하는 상품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림을 봤는데 음... 아는 동생에겐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정말 못 그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장 유행하던 작품의 캐릭터를 그린 상품이었고,
그게 또 팔리더군요.
당시에는 코믹을 종종 갔었는데...
잘 그린 오리지날 상품들보다도 제 아는동생의 상품과 같이 못 그린- 하지만 유행작을 그린 상품들이 더 잘 팔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저게 소위 말하는 대세를 탄다는 건가...’
장르판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 하나가 유행합니다.
그 작품을 재미있게 본 독자들은 그 작품과 ‘비슷한 작품’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 작품에서 느낀 ‘익숙함과 재미’를 다른 작품에도 투영하는 거죠.
- 이건 독자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보통 다 그럽니다. 저도 그렇고요.
묵향이 빅히트를 친 이후 참으로 많은 차원이동물과 소위 말하는 타이탄물이 등장했습니다.
몇 번의 유행과 ‘대세’가 장르판에 불었고,
나중에는 아예 카테고리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영지물 / 환생물 / 겜판물 / 유희물 / 차원이동물 등등
근래에는 레이드물 / 스포츠소설 요 두가지가 흔히 말하는 대세를 이끌고 있죠.
조아라의 야구매니저가 어마어마한 빅 히트를 친 이후 연타석 홈런을 치듯 문피아에서 필드가 대박이 났습니다.
이 두 작품의 성공은 스포츠물이라는 새로운 대세를 만들어냈고,
본래 문피아에 다섯 개가 채 못 되었던 스포츠물의 숫자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오십 개를 넘게 되었죠.
조아라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었던 레이드물의 경우엔 문피아에서 다소 늦게 터지긴 했지만 둠스데이가 이끌고, 플레이 더 월드가 미는 형식으로 그 대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기업물’이 부각이 되고 있죠.
사실 한 오 년 전만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스포츠물과 기업물이 대세가 된다?
제가 글을 처음 쓰던 시절에는 삼대 금기가 있었습니다.
이거 쓰면 망한다!-는 불문율들이었는데
여자주인공 / 총 쏘는 주인공 / 현대물 이 바로 그 삼요소였습니다.
음, 뭔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언제나처럼 횡설수설이 되는군요.
아무튼 대세는 분명 존재하고, 대세를 타는 것은 작품을 흥행시키는데 있어서 확실히 유리합니다.
하지만 대세를 타기 전에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팔 년 전 일이네요.
첫 출간작을 위해 출판사를 왕래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기획팀장이셨던 형님과 이야기를 하며 어린 시절의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음에는 대세 타는 거나 써보려고요.”
그러자 기획팀장이신 형님이 제게 되물으시더군요.
“그래서 그 대세가 뭔데? 너 지금 대세가 뭔진 알아? 그리고 그거 쓸 수는 있어?”
당장에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생각해 봤죠.
대세를 탄다. 대세타는 걸 쓴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가. 너무 우습게 본 건 아닌가.
그 뒤 가만히 살펴보니 확실히 대세를 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디시 판타지 갤러리를 자주 다녔는데요 (요새도 종종 들립니다.)
이러이렇게 쓰면 된다.
양판소의 법칙
까짓거 나도 그렇게 써준다
등등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조합해서 써봐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더군요.
대세가 한 번 시작되면 그 대세를 따라 비슷한 글들이 수십, 수백 개가 쏟아지게 됩니다.
글이 많으니, 자연히 개중 성공하는 글들 역시 많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냥 망하는 글 역시 많죠.
당시에는 역시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요새는 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아니, 추가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죠.
쓰고 싶은 걸 쓰지 않았구나.
잘 쓰는 걸 쓰지 않았구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쓰지 않았구나.
위에 언급했던 제 아는 동생은 그 때 분명 생각보다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많이 팔진 못했고, 그 아는 동생이 만약 상품을 잔뜩 만들어 갔다면 재고의 바다에서 헤엄을 쳤겠죠.
아무리 대세를 탄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그냥 유행하는 코드가 잔뜩 삽입되었다고 재미를 느끼진 않습니다.
분명 올해 여름 최고의 대세는 스포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스포츠물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스포츠물을 못 쓴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전 야구나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사실 국내에 어떤 팀이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니까요. 월드컵이나 되어야 한 두 경기 볼까말까한 게 접니다.
이런 제가 스포츠물을 쓰면 그게 재미있을까요?
스포츠를 잘 알지도 못하고, 스포츠란 장르로 어떤 재미를 줘야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하는데?
어떤 사이트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런 글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스포츠물을 쓰려고 하는데 내가 스포츠를 잘 모른다. 쓸만한 스포츠 좀 추천해 달라.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주제넘은 짓이지만 말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 결국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요 orz
대세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대세를 타는 것은 분명 흥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억지로 그 대세에 맞춰서 글을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글을 쓰는 편이 훨씬 좋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떤 대세든 반드시 시작이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시작’인 만큼 당시의 유행하는 대세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내가 쓴 글이 대세가 될 수도 있지.’
좀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전 신작을 쓸 때면 간혹 저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덧1) 대세를 따라 쓰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유행하는 대세와 맞지 않는데도 억지로 대세에 맞추려는 건 좀 지양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죠.
덧2) 언제나처럼 횡설수설이었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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